[6‧25 기념 특집] 다시는 잊지 말아야 할 역사의 현장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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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71주년 특집 증언

지평리 전투, 고립 속 백병전으로 중공군 최초 패전 안겨

▐ 동족상잔의 6.25전쟁 발발 71주년

6․25전쟁은 북한이 1950년 6월 25일 적화통일을 위하여 기습적으로 불법 남침한 전쟁이며, 유엔군 측과 공산군 측이 1953년 7월 27일 휴전에 합의하기까지 3년 1개월 2일간 한반도에서 전개되었던 전쟁이다. 이 전쟁은 한반도의 분단을 더욱 고착화시키는 아픔을 남긴 채 종전이 아닌 정전 또는 휴전의 형태로 멈추어졌다. 6․25전쟁은 동족상잔인 동시에 제2차 세계대전이 종전된 이후 5년도 되기 전에 발생한 대규모의 무력 충돌로서 한반도는 물론 세계사의 흐름에도 많은 영향을 미친 사건이었다.

▐ 6.25전쟁 승전지 지평리 전투

6.25전쟁 기간 유엔군 상호 간의 협조로 중공군의 공세를 막아내고 전세를 역전시킨 대표적인 전투가 지평리 전투이다. 지평리 전투는 1951년 2월 13일부터 15일까지 미 제2사단 제23연대가 배속 된 프랑스 대대와 함께 지평리를 포위한 중공군 6개 연대의 집중공격을 전면 고수방어로 막아낸 전투이다. 당시 지평리는 국군과 유엔군의 병참선의 중심지이면서 유엔군이 한강으로 진출할 수 있는 전략적인 요충지였다. 이 전투에서 미23연대는 전선 우측의 국군 제3․8사단이 중공군의 제4차 공세에 밀려 철수함에 따라 중공군 제39군에 포위되고 말았다. 그러나 프랑스 대대와 함께 고립된 상황에서도 전면 방어태세로 전환해 중공군의 파상공격을 3일 동안 막아냈다. 그 후 미 제5기병 연대가 후방에서 적군의 포위망을 돌파하여 미 제23연대와 전선을 연결함으로써 중공군은 퇴각하였다.

▐ 작은 전투, 큰 전승으로 방어선 저지

지평리 전투에서 유엔군은 전사 52명, 부상 259명, 실종 42명이 발생되었으며, 중공군은 4,946명이 사살, 78명이 생포되었다. 지평리 전투는 전투 규모나 전투 기간으로 볼 때 그렇게 큰 전투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전투의 결과와 영향은 그 어떤 전투보다도 컸다. 1950년 10월 중공군이 개입한 이후, 유엔군이 최초로 인해전술로 몰아붙이는 중공군의 대규모 공세를 물리치고 승리한 전투로서 중공군은 막대한 손실을 입고 제4차 공세에 실패하게 되었으며, 유엔군은 재 반격의 기틀을 다지게 되었다. 이후 유엔군은 중공군의 공격에 자신감을 갖게 되었으며, 38도선 회복을 위한 반격작전을 수행할 수 있었다.

▐ 지평리 전투의 영웅 프랑스 대대 ‘몽클라르’ 대대장

참전유공자 이정훈 장로(89세)는 17세의 나이로 지평리 전투의 참혹한 현장 목격 후 참전하여 현재까지 지평리 마을을 지키고 있으며 지평교회 은퇴장로로서 참전유공자회에서 활동하며 동족상잔의 비극을 잊지 않기 위해 역사의 현장을 보존하는 기념관 설립 등에 헌신하며 이바지하고 있다. 지평역이 내려다보이는 곳 지평리전승기념관에는 당시 전우들의 군수물품과 미2사단 23연대의 전쟁사 기록, 지평리 전투 영웅 프랑스 몽클라르 장군(한국전 당시 스스로 강등하여 중령으로 참전)의 전술 작전상황 기록들이 보존되어 있다. 참전용사 이정훈 장로는 “면소재지 언덕 8부 능선 아래는 중공군의 시체가 포격으로 불에 탄 상태로 널부러져 있었다”고 했다. “한반도의 중심이 되는 요충지 지평리 전투에서 중공군은 보급로가 차단되어 기세가 완전히 꺾이게 되었다”며 전선에서 마지막의 참혹한 현장을 지켜 본 이정훈 장로는 증언했다. 전사에 길이 남을 지평리 전투에서 고향을 지키고 나라와 민족을 지키는 사명으로 청춘을 바쳐온 선배들이 계셨기에 오늘이 있다는 것에 감사드리며 호국영령님들께 고개가 숙여진다.

▐ 3만 5천여 중공군과의 5일간의 사투

“1951년 2월 13일부터 17일까지 불과 5일 동안의 전투는 생사를 넘나드는 사투였다”며, “첫날 13일 중공군 제39군 예하의 5개 사단이 저녁 10시경 일제 사격을 해왔다. 박격포 소리가 진동할 정도의 공격에도 프랑스군과 미군은 자동화기기로 대응을 했는데, 적군은 아랑곳 하지 않고 벌떼처럼 시체와 부상자들을 밟고 공격을 해왔고, 미군 1중대가 섬멸되는 피해를 입었지만 프랑스군이 서부진지를 사수하며 밤새 저항하면서 진지를 지켜냈다”며 “이튿 날 14일 다시 중공군의 공격으로 프랑스군과 미군의 공세를 늦추지 않았고 백병전까지 불사하며 항전한 군은 미군 1기갑 사단의 전차 공격으로 완전히 적을 섬멸하게 되었고, 적군은 지평리에서만 3만 5천명의 시체를 남기고 퇴각했다”며 “당시 아군은 6천명으로 다섯 배나 되는 적군을 마주하고 용감하게 나라를 지킨다는 일념으로 싸워 승전고를 울리게 되었다”고 이정훈 장로는 90세에 가까운 고령의 나이에도 자신감에 찬 목소리로 그 때를 증언했다.

▐ 지평리 전투 전적비, 충혼비, 기념관

지평리 전투 지역과 가까운 양평군 지평 지역에는 전적비, 충혼비, 기념관이 세워져 있다. 무왕리에는 두 개의 굴 사이에서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졌던 곳으로 승전을 기념하여 세워진 쌍굴참전 기념비, 지평리 양조장 앞에는 프랑스군 중장으로 퇴역한 몽클라르 장군이 자원하여 한국전에 참전하여 지휘소로 사용했던 현장에는 프랑스 대대 기념비, 지평역 프랑스 전적비 등 국군과 미군, 프랑스군 참전 충혼비가 세워져있으며, 지평리 참전유공자들이 뜻을 모아 전투 기록들을 발굴하며 역사의 자리에 ‘지평의병 지평리 전투 기념관’을 설립하고 매년 2월에 기념식을 통해 호국영령들의 뜻을 기리고 있다. 기획특집 탐방 인터뷰를 위해 귀한 자료를 제공해 주신 지평리 전투 기념관 정운학 실장님과 참전용사로서 생생한 증언을 해 주신 지평교회(이성재 목사 시무) 이정훈 은퇴장로님께 감사드린다.

/구성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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