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일저일 생각하니] 어린 천사 꽃누이 정자 동생의 그리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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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이듬해 나의 어머니는 예쁜 누이동생 정자를 낳아 주셨다. 어머니가 품앗이로 여름날 동네사람 모심는 논에 찾아가 논언덕에서 정자 젖을 먹게 했다. 정자는 더욱 귀엽고 예쁘게 잘 자랐다. 우리집은 지리산 기슭 함양 마천 고을 섬말동네에 있었다.

농토도 없고 아버지 지게가 식구의 밥이었다. 정자는 이런 가난 속에도 곱게 자랐다. 공비 피해 때문에 지서 가까운 운학정 길가 뒷방 하나에 잠시 옮겨가 살았다. 이때 정자가 턱을 다쳐 피가 흘렀으나 병원도 약방도 없는 마천땅, 된장 말고 달리 약이 없었다. 보릿고개 가난 속에도 천사처럼 곱게 커가던 정자에게 안타까운 일이 생겼다. 어려서 친정 어머니를 여의고 아버지는 일본여자와 일본에 살기 때문에 숙부밑에 자란 어머니는 진주 숙부댁이 친정이었다. 때거리에 시달려 진주 친정에 가서 먹거리를 좀 얻어 오려고 어머니는 마천에서 높은 오도재 산길을 걸어 함양읍내로 나가서 당시 진주행 남선여객, 대한금속 버스를 타려고 집을 나섰다. 어린 딸 정자도 함께 따라 나섰다. 집에 가라고 해도 막무가내로 운학정 동네에서 면소재지 땅벌 신작로길까지 따라 온 모양이다. 어린 딸을 데리고 근 800미터가 되는 오도재를 넘어 함양읍내로 갈수 없었다. 달래다 화가 난 어머니가 집에 돌아가라고 사정없이 때려 준 모양이다. 참 슬픈 일이다. 어머니를 그토록 따르는 정자가 평소 자기를 정 깊게 사랑해 주는 큰오빠에게 데려다 달라하여 어머니는 면사무소 한모서리에 자리잡은 우리 6학년 교실 앞으로 정자를 데려와 수업 중인 나를 불러냈다. 지리산 공비가 마천초등학교를 불질러버려 교실 잃은 6개학년 교실이 뿔뿔이 흩어져 있었다. 우리 6학년교실은 면사무소에 있었다. 교실 밖에 나온 내 눈에 어린 정자는 한참을 흐느끼며 어깨도 들썩들썩했다. 슬픔에 마냥 젖은 정자의 두 눈에 아직도 눈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정자야, 엄마 진주 외갓집 가셔서 쌀 얻어 오실거야, 그때까지 오빠하고 엄마 기다리자.” 내가 달래는 말에 정자는 마지못해 슬픈 고개를 끄덕였다. 어린 딸을 할 수 없이 심히 때린 어머니도 지극히 마음 아픈 모습으로 면사무소 대문을 나가셨다. 어린 천사 정자는 마침 면에 호적초본 떼러 온 먼 친척뻘 아저씨 따라 먼저 집에 갔다. 수업 끝나고 집에 가니 시무룩히 혼자 앉아 있던 정자가 “오빠야” 하며 무척 반가워했다. 땅따먹기 놀이하다 정기 버스도 안 다니는 마천에 엄마가 버스 타고 오시는가 땅벌 신작로길을 바라보자는 정자의 엄마사랑 마음 따라 운학정 신작로 길가에서 땅거미가 으슥하도록 땅벌 신작로 길을 바라보았다. 앞에는 맑은 냇물만 흘러갔다. 어느날 수업 마치고 집에 오니 손에 과자든 정자가 “오빠야, 엄마 왔어, 얼른 가봐!” 말하며 그리던 엄마를 만나 정자는 생기가 펄펄 살아 있었다. 나의 6학년 한 학기를 앞두고 함양읍내로 이사를 갔다. 읍내 초등학교로 전학가려 했으나 선생님 모두 나를 사랑하여 만류함으로 전학을 포기하고 염동석 교장선생님 사택에서 함양중학 입시 준비생 몇 학생과 자취를 했다. 옷에 이가 불불 기어도 옷을 가져오지 않는 아버지를 오래 기다렸다. 1949년 가을 면사무소 교실로 아버지가 오셨다. “동춘아 나좀 보자” 하며 면사무소 대문간으로 나를 데려간 아버지 첫 마디가 “동춘아, 정자가 죽었다”였다. 청천벽력 같은 슬픈 소리였다. “정자야, 정자야!” 외쳐 울며 나는 데굴데굴 굴렀다. 불의의 사고로 증조부 제삿날 밤 하늘나라 간 정자의 죽음, 내 평생의 큰 비극이다. 향가 제망매가 지은 월명사처럼 나도 어린 천사 꽃누이 생각에 한평생 가슴 아프게 살아가고 있다. 나의 시와 수필에 정자는 살아 숨쉬고 있다.

오동춘 장로

<화성교회 원로 문학박사,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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