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일저일 생각하니] 연세 오석두 교수, 최현배 스승 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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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학명문 연세대 교수에 오석두(五石頭) 스승이 계신다. 이분들을 속칭 돌대가리 교수로 불렀다. 국문과에 최현배, 김윤경, 철학과에 정석해, 수학과에 장기원, 영문과에 심인곤 교수 이렇게 다섯분이다. 모두 원리원칙이 강하고 휴강없이 강의에 충실하셨다. 최현배 스승의 <우리말본> 강의를 직접 들은 내가 일화 한 토막을 소개하려고 한다.

애국지사로 한글학자이신 외솔 최현배(1894-1970) 스승은 경남 울산에서 태어나셨다. 

한성고등보통학교 수석 합격 후, 졸업과 더불어 일본에 유학해 히로시마 사범대, 경도제대 등에서 유학해 교육학, 철학을 전공하고, 1926년 연희전문학교 교수로 부임했다. 한힌샘 주시경 선생 수제자로 한글연구에 몰두해 한국 문법의 경전이라 할 수 있는 <우리말본 1935> 저서를 내셨다. 그보다 앞서 경도제대 대학원 재학 중에 <조선민족갱생의 도>를 1926년도 동아일보에 66회에 걸쳐 발표해 조선민족의 앞길을 등불처럼 밝혀 주셨다. 1930년도에 단행본으로 발간되었을 때 일제는 판매금지책으로 만들었다. 

최현배 교수는 ‘한글이 목숨’이라 말씀하시며 우리 국어를 지키다가 함흥감옥에 3년 옥고를 치루셨다. 광복후 한글세대의 바른 국어교육 토대를 세우셨고, 끈질긴 국한혼용파와 대결해 한글 사랑, 나라사랑의 승리로 이끄셨다. <한글날노래>로 한글겨레를 교육해 한글로 나라의 힘을 기르자고 하셨다. 한글학회 이사장으로 계시던 중 1970년 3월 23일 돌아가셨다. 사회장으로 경기 양주군 진접면 장현리에 산소를 마련해 드렸다. 돌아가신 후 곧 추모단체 재단법인 외솔회를 만들었다. 

초대회장에 연세대 교수 홍이섭 박사를 모셨다. 1970년도 어느 3월 23일 추도식을 마친 추도객 일행은 당시 양주군 양현리의 외솔 무덤(2009년 7월 31일 대전 현충원에 옮김)에서 참배의 예를 드렸다. 외솔 제자 모기원 교수가 외솔 일화를 말씀했다. 

1938년 봄 연희전문학교 국문과 최현배 교수 강의가 휴강이라 해 백양로를 걸어 가는데 인력거 한 대가 쏜살같이 옆을 지나갔다고 했다. 과대표가 최현배 교수 강의가 휴강이 아니라 해 강의실에 가 보니, 최현배 교수의 얼굴이 두 눈만 남기고 하얀 붕대로 감겨 있었다고 했다. 머리 부스럼 수술을 하고, 강의 때문에 부리나케 학교로 달려온 것이다. 최현배 스승 강의는 결코 휴강이 없었다고 한다. 

오는 3월 23일로 53주기 외솔선생 추도일이 다가온다. 장충단공원 외솔선생 기념비 앞에서 꽃 바치기 추도식이 열릴 것이다. <나라사랑의 길 1958> 저서에서 영리한 꾀배기가 되지 말고 손해보고 양보할 줄 아는 어리배기로 살아가라고 청년들을 일깨워 주셨다. 

나는 오늘의 우리 대학교수들이 연세 오석두 교수의 모범적인 교수 스승상을 잘 따라 주길 바란다. 외솔 후학으로 허웅, 박창해, 김석득, 남기심, 김슬옹 박사 등이 있다. 

오동춘 장로

<화성교회 원로 문학박사,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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