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일저일 생각하니] 어머니가 주신 돈 500원과 6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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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부산 시내에서 밥상 사라고 외치고 다니면서 밥상 하나 팔아야 가족의 끼니를 이어가던 가난한 노동자의 아내 어머니는 수중에 돈이 있을리 없다.

그런데도 1962년도 7월 해병대에 입대하여 훈련차 진해로 떠나는 큰아들 내게 당시 화폐개혁된 돈 500원을 나의 용돈으로 주셨다. 진해 경화동 해병신병훈련소에 훈련 중 내무반 정돈하는 중에 1중대 집합 구령이 들려왔다.

벗어둔 내 윗옷이 없어 아무 옷이나 입고 연병장에 나갔다. 늦게 나가면 소대장 기합이 무서웠기 때문이다. 그 때 2소대장이 내 윗옷을 들고 왔다. 나는 입었던 다른 훈련병 옷을 벗어주고 내 윗옷을 받았다. 내 윗옷을 건네주는 2소대장 중사는 “주머니에 있는 돈 500원은 내가 썼네”하는게 아닌가. 어머니가 아들을 사랑해 주신돈 500원은 이렇게 날아가 결국 어머니께 불효가 되었다. 이 일로 나의 소속 1소대장 이강봉 소대장은 나이도 많고 대학도 나온 사람이 남의 옷이나 바꿔 입는 부족한 사람으로 얕보았다. 소대장의 불신 속에 3개월의 훈련이 다 끝날 무렵 해병에 먼저 입대한 제자가 나를 선생님 하며 면회 와서 이강봉 소대장에게 잘 도와 드리라는 말을 들은 후 나는 사병132기 700명 훈련병 2달 교육 받은 내용학과 시험에 2등을 했다. 1등도 우리 1소대에서 나왔다. 1소대장은 그 때부터 나를 신뢰가는 인격자로 봐 주었다. 한번 신뢰를 잃으면 되찾기가 힘든 법이다.

해병대에서 3년 병역의무를 다 마치고 취직차 서울 갈 때 어머니는 그 어려운 살림 중에 600원을 주셨다. 1965년 1월 나는 취직차 어머니가 주신 생활 밑천 600원으로 상경했다. 어느 여고에 취직되어 나는 그해 여름 결혼하여 3남매 부모가 되었다.

어머니가 주신 500원은 남 좋은 일만 시켰고 600원은 서울에서 교통비로 써 가며 일터를 구하고 몇 달 신세진 처가에서 독립해 나왔다. 아들에게 성경책을 물려 준 링컨 어머니는 아들을 16대 대통령으로 만들었다. 맹자 어머니는 아들을 공자 다음 가는 동양의 성인 학자로 만들었다. 우리나라 명필 한석봉 떡장사 어머니, 대성리학자 율곡을 낳은 신사임당 어머니, 상해 임시정부 주석 백범 김구를 낳은 독립운동가 곽낙원 어머니는 다 희생과 사랑이 넘치는 훌륭한 어머니 모습이다. 우리 어머니는 “자식은 쪽박을 차도 가르쳐야 한다”는 교육신념으로  5남매에게 “너희는 뼈 있게 줏대있게 살아가거라”라는 말씀으로 가정교육을 해 주셨다. 양주동 작사의 ‘어머니의 마음’ 윤충병 작사의 ‘어머님의 은혜’노래에 어머니의 은혜가 하늘보다 높고 바다보다 넓다고 노래하고 있다. 일본에서 나와 세 살 동생이 백일해를 앓다 죽을 때 어머니는 부엌 칼로 약지 손가락에 피를 내어 죽는 아들 입에 넣어 주시던 어머니사랑을 나는 고향 경남마천초등학교 시절에 직접 보았다. 진주에서 지리산 기슭 마천에 시집 오시어 농사 노동도 많이 하신 어머니는 예절도 바르시고 바느질 솜씨도 고와 섬말 동네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으셨다. 나는 어머니와 일본 마천 함양읍내 부산 서울에서 함께 살았던 추억이 생생하다. 나와 아내의 전도로 화성교회 집사님이 되시어 2007년 9월 16일 화곡동 참요양병원에서 돌아가셨다. 사셨던 고향 경남 마천 섬말동네 언덕에 아버지와 함께 주무신다. 해병 입대 때 500원 서울 상경 때 600원 주셨던 어머니 사랑의 돈 평생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다. 어머님께 불효생각 날마다 가슴 아프다.

오동춘 장로

<화성교회 원로 문학박사,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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