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로] 생명의 길을 따라 온 걸음 정봉덕 장로 (7)

Google+ LinkedIn Katalk +

이미 오래전에 시작된 일 (2)

  정봉덕 장로는 1927년 생으로 평북 정주에서 태어나 군대시절 하나님을 구주로 영접한 뒤 60여 년간 주의 신실한 종으로 한국교회를 위해 애썼다.

  총회전도부 간사를 시작으로 총회 사회부 총무, 공주원로원 원장, 한아봉사회 설립, 생명의 길을 여는 사람들 등을 설립했다. 남은 생애 다가올 통일을 준비하며 북한 정착의 기틀을 마련하는데 최선을 다하며 기도로 준비하고 있다.- 편집자 주 –

그때는 군인들에게 씨레이션이라고 해서 소식지, 콩이든 깡통, 비스킷, 껌, 담배 한 갑 등이 들어 있는 상자를 한 사람에게 하나씩 나누어 주었다. 나는 담배를 끊었기 때문에, 아니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담배에 대한 마음이 끊어졌기 때문에 처음에는 받은 담배를 통째로 버렸었다. 그러다가 내게는 필요 없는 이 담배를 조금 더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에는 소대원들 30여 명이 각각 자기 담배 갑에서 한 개비씩을 꺼내 분대장과 소대장, 선임하사에게 상납하는 전통이 있었다. 그러니 한 갑 스무 개비를 받아도 소대원들이 피울 수 있는 담배는 열일곱 개가 전부인 셈이었다. 나는 내 담배를 통째로 소대장에게 주면서 소대원들에게 따로 각출하지 말아 달라고 이야기했다. 소대원들은 “선임하사가 예수 믿으니까 우리에게 돌아오는 게 있다”며 좋아했다.

불시험

주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믿음 안에서 살기 시작하자 하루하루가 즐겁고 기뻤다. 나의 신앙은 하나님이 미리 준비해 놓으신 사람들과 성령의 도움으로 무럭무럭 자라고 있었다. 그때 내 나이 스물넷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런 내 마음에 찬물을 끼얹으려는 작은 시험 하나가 찾아왔다. “천당 가려고 예수 믿는 거냐?” 친구 상사들이 반조롱조로 말을 건네 왔다. 주눅이 들 법도 한데 오히려 나는 이때다 하고, “그렇다!”며 내 신앙태도를 분명히 했다. 시험이 오면 담대하라던 기재계 하사의 말을 따른 것이었다. 그 이후로 나를 놀리는 친구들이 없었다. 그때는 알지 못했다. 그것이 신앙의 관문이라고도 할 수 있는 첫 시험의 예고편 같은 것이었음을 말이다.

그 시험은 최전선에서 양구로 이동하여 부대를 정비하는 기간에 갑작스레 닥쳤다. 당시 나는 박격포 소대의 소대장을 맡고 있었다. 정식 소대장은 아니고 일등상사로서 소대장 대행 근무를 하고 있던 때였다. 하루 종일 겨울 눈구덩이 속에서 훈련을 받고 귀대하면서 대원들은 눈에 젖은 솔나무 가지를 잔뜩 가지고 돌아왔다. 1개 분대가 같은 막사 안에서 불을 피웠고 곧 저녁 식사가 배달되어 왔다. 나와 기재계 배 하사는 식사를 위해 다른 막사에 들어가 있었는데, 식사기도를 마쳤을 때쯤 갑자기 펑하는 폭발음이 들렸다. 깜짝 놀라 밖으로 나와 보니 방금 전까지 우리가 있었던 분대가 사고를 당한 것이었다. 너무 추운 나머지 몸을 녹일 생각만 앞서, 급히 무거운 배낭을 벗어 놓는다는 것이 그만 수류탄까지 난로 위에 놓고 불을 피운 것이었다. 당시 천막 내에는 박격포단 상자로 만든 난로를 사용하고 있었다. 이 사고로 1개 분대 7명 전원이 사상하고 말았다.

어처구니없는 사고로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것은 조용히 넘어갈 수 없는 매우 큰 사건이었다. 조금 전까지 함께 있었던 이들에게 벌어진 이 끔직한 일에 나는 놀람과 충격으로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때 나를 엄습한 감정은 어이없이 죽어버린 청년들을 향한 연민도, 분대를 제대로 살피지 않았다는 자책감도 아니었다. 그것은 소대장 대행 중이던 나에게 닥칠 엄중한 문책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죽고 죽이는 것이 다반사인 전쟁터에서 죽음을 마주하는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군복만 입었을 뿐 이십대 초반의 겁 많고 어린 청년이었던 나는, 내 걱정으로 다른 것을 떠올릴 여유가 없었다. 부끄럽지만 그것이 그때 나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내가 공포심으로 떨고 있을 때 기재계 하사는 전혀 다른 걱정에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큰일 났다. 이제 막 예수 믿기 시작한 정봉덕 상사가 이 일로 시험에 들 수 있겠구나.’ 내 손을 붙들고 단호한 눈빛으로 말하던 그의 모습이 기억난다. “예수님을 믿기 시작하면 마귀가 꼭 이런 식으로 믿음의 형제를 괴롭히는 법입니다. 그러니 다른 생각 말고 오직 주님만 바라보며 기도로써 이 어려움을 극복해 나갑시다!” 두려움으로 요동치던 내 마음이 기재계 하사의 말에 조금씩 안정을 되찾았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 사건은 아무런 질책 없이 마무리 되었다. 소대장 대행 중이던 나에게 그 어떤 책임도 묻지 않은 채 말이다. 막 자라기 시작한 신앙의 어린싹을 하나님이 친히 보호하신 것이었다. 나는 다시 한 번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올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지금도 가끔씩 생각해 본다. 만약 그때 강도 높은 문책을 당했다면 막 신앙에 눈을 뜬 초신자로서 내가 과연 믿음을 유지할 수 있었을까.

갈급한 심정으로

시련을 극복하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더욱더 성령을 의지하며 군대생활을 이어갔다. 어느덧 주위에서는 나를 예수 믿는 사람으로 인정했고, 나는 대원들 중 기독교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을 찾아가 신앙의 기초를 알려 주기까지 했다. 그러는 가운데 성경도 많이 읽고 찬송도 많이 부르게 되었다. 전쟁터에 다른 신앙서적이 있을 리 없으니 내가 들여다보는 것은 오로지 성경뿐이었다. 그런 내가 딱해 보였던지 어느 날 3사단 군목 신태준 목사가 ‘기독교의 진수’와 ‘단권주석’이라는 책을 주셨다. ‘기독교의 진수’는 김치선 박사가 쓴 책으로 산상수훈 강해였고, ‘단권주석’은 유형기 박사가 쓴 신구약 성경주석이었다. 나는 목마른 자가 물을 마시듯, 열흘 굶은 사람이 밥을 먹듯 감격에 겨워하며 이 책들을 파고들었다. 당시 내게 신앙의 불을 지피는 책들은 성경과 이 책들뿐이었기에 틈이 날 때마다 이것들을 읽고 또 읽었다. 나는 이 책들을 통해 평소의 사고방식이나 생각들에서 벗어나 기독교적인 생활철학과 윤리를 가진 자로 거듭나게 되었다. 다시 말하면, 신앙적인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게 된 것이다. 그 뒤로 많은 신앙서적들을 읽었지만, 그때만큼 절실한 마음으로 뜨겁게 공부한 적은 없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런 점에서, 전쟁터에서 습득한 성경지식으로 지금껏 버티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이다. 그러고 보면 인생의 어느 한 시기, 한 정점에서 신앙의 심지가 단단히 박히는 모양이다.

입에서는 쉴 새 없이 찬송이 흘러나왔고, 자투리 시간이라도 생기면 언제 어디서든지 주머니에서 성경을 꺼내던 시절이었다. 밥을 굶고는 살 수 있어도 주의 말씀을 읽지 않고는 단 하루도 견딜 수 없었던 그때의 신앙의 열정과 순수함이 새삼 그리워진다.

당시 내가 속한 연대에는 군목이 없었다. 그래서 사단 군종부에 복무하던 박영환, 신태준 두 목사가 우리 연대가 있는 일선 고지로 매주 한 번씩 찾아 와서 예배를 인도해 주었다. 우리 대대에 예수 믿는 군인이 대여섯 있다는 소리를 듣고 그 먼 곳에서부터 와 주었던 것이다. 큰절이라도 올려야 할 만큼 감사한 일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식사 대접이었다. 심방 기도회가 끝나면 점심을 대접해야 하는데 전쟁터에 반찬이 있을 리 만무하여 늘 고민이었다. 나는 궁리 끝에 직접 반찬을 만들기로 결심하고는 목사님이 오시기 하루 전날 혼자 산에 올라가 고사리를 뜯어다가 펄펄 끓는 물에 데치고 된장에 무쳐서 상에 올렸다. 초라하기 그지없는 상이었지만, 두 분은 맛있다고 하시며 한 그릇씩을 비우셨다. 그 모습이 내게는 더할 수 없는 기쁨이자 흐뭇함이었다. 그때 나는 주님의 종을 정성을 다해 대접할 수 있었던 것이 하나의 은사임을 깨달았다. 일생 동안 많은 목회자들을 대접했지만, 그때만큼의 감사와 기쁨을 체험하지 못했음을 고백한다. 지금 돌아보면 그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축복이고, 선물이었다.

정봉덕 장로

<염천교회 원로>

공유하기

Comments are clos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