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 회복] 신앙 생활, 체험과 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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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같은 죄인이 장엄하고 영광스러운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사실이 실로 놀랍기만 하다. 불구하고 왜 나는 그 기쁨을 누리지 못하고 사는 것일까? 온 마음으로 그 놀라운 은혜를 왜 찬양하지 못하고 살아갈까? 어찌 감사한 마음이 부족할까? 내 마음 속에 성령님께서 임재해 계셔서 나를 주장하시고 인도함을 받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인격화 되지 못한 때문이다.

 언제부터인지 우리에게는 말씀보다 체험을 중요시하는 신앙이 나타났다. 체험을 중시하는 사람에게는 무엇보다도 체험이 권위가 되고 모든 사고(思考)와 판단의 기초가 된다. 부흥회 바람이 거세게 불던 70~80년대에는 놀라운 체험들을 성령님으로부터 받았다고 간증을 했다. 부작용도 있었다. 균형을 잃은 신앙은 언제나 위험하다. 체험에 의해 살고, 체험만 추구하며 의지하는 신앙은 건강한 신앙이 아니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 같은 자들에게서 너는 돌아서라.”   

 진리의 능력에 의해 지배 받는 신앙이 옳다. 삶을 변화시켜야 옳은 신앙이다. 주의할 것은 이단(異端)도 영적 체험을 한다는 것이다. 기도하면서 환상을 보기도 하고 몸이 따뜻해지기도 하며 기운이 솟기도 한다. 마귀는 몸으로 느끼게 역사(役事) 한다. 말씀이 윤리적으로 실천되어야 바른 신앙이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다.” 주님과 인격적인 교제를 하는 것이다. 체험은 내 삶을 변화시키는 것이어야 한다. 내 안에 거하시는 성령님을 통해 기쁨을 누리는 교제여야 한다.  

 감정은 영혼을 구성하고 있는 의지와 성향이다. 감지할 수 있는 활동이다. 좋아하거나 싫어하거나 기뻐하거나 슬퍼하거나 인정하거나 거절하는 기능이다. 인식과 사유(思惟)의 기능이다.  사물을 분별하고 판단한다. 즉 지성(Intelligence, Understanding)이다. 신앙 감정이 은혜로운 것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표지들은 무엇인가? 은혜로운 감정은 신앙과 신학에 관심이 생긴다. 말씀과 친밀해진다. 찬송이 부르고 싶어진다. 구원의 확신이 생긴다. 은혜로운 감정에는 성령님이 내주하신다.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 하나님의 아름다움에 대한 인식이 생긴다. 예수님만이 진리라는 확신을 갖게 된다. 성품이 변화되고 참된 겸손의 덕이 생긴다.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아간다. 어느 한 말씀, 한 성향에 매몰되지 않고 신앙의 균형을 이루게 된다. 예수님을 향한 갈망이 깊어진다. 말씀이 행위로 실천되는 신앙생활을 하게 된다. 그리스도인은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인해서 새로워진 사람이다.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는다면 진정한 체험이 아니며 성령 안에서 교제하는 것도 아니다. 감정은 체험의 일부이지만 체험과 똑같은 것은 아니다. 성령께서 주시는 진정한 체험은 모든 교제를 포함하지만 감정은 체험의 특별한 한 부분이다. 

 박수를 치며 소리를 지르고, 찬양하며 둥둥~ 북을 친다. 합창을 반복하는 예배들이 있다. 감정의 고조를 위해 그렇게 한다. 감정적이 될수록 성령님의 임재가 임한다고 그들은 생각하며 인도한다. 이것은 단순한 감정주의일 뿐이다. 생각해 본다. 성령님께서 감정이 이렇게 고조되는 곳에 임하시겠는가? 그리스도인의 바른 신앙은 균형과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체험이나 감정만이 아닌 전인격(全人格)의 신앙이 되어야 한다. 이성(理性)과 감성과 의지가 모두 합해져야 한다. 기쁨도 체험되어져야 한다. 복음의 진리를 깨달으면서도 아무런 감정이 없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주는 나의 목자이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감정은 깊고 고귀한 것이다. 감정은 진리의 확신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진리의 이해로부터 생기기 때문이다. 신앙 감정에는 고귀함과 경이감(警異感)이 있다. 전인(全人)이 진리를 깨닫고 감동하는 것이다. 감정은 우리를 감동시킨다. 성령의 능력의 결과이다. 진실한 감정은 우리에게 생기(生氣)를 불어넣어 준다. 그러나 교리적 신앙이 삶의 지배적 원리가 되어야 하고 모든 행위의 근원이 되어야 마땅하다.

김용관 장로

<광주신안교회·한국장로문인협회 자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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