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로들의 생활신앙] 상대(相對)와 반대(反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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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과 불행이 반대말인가?/ 남자와 여자가 반대말인가?/ 길다와 짧다가 반대말인가?/ 빛과 어둠/ 양지와 음지가 반대말인가?/ 있음과 없음/ 쾌락과 고통/ 절망과 희망/ 흰색과 검은색이 반대말인가?// 반대말이 있다고 굳게 믿는 습성 때문에/ 마음 밑바닥에 공포를 기르게 된 생물/ 진화가 가장 늦된 존재가 되어버린/ 인간에게 가르쳐주렴, 반대말이란 없다는 걸 알고 있는 어린이들아/ 어른들에게 다른 놀이를 좀 가르쳐주렴”(김선우/ 여전히 반대말 놀이)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얼마나 이항대립(이원론)적 배타성의 폭력에 물들어 있었나? 하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세상에는 반대말만 갖고 설명할 수 없는 많은 중간항들이 있다. 꿈(Vision)이나 사랑 같은 것이 그 중간항에서 자라난다. 이 세상이 얼마나 복합적이고 섬세하면서도 다양한데 아직도 좌파와 우파만 있는줄로 알고 살겠는가? 동일물의 이면성(異面性)이 얼마나 많은가? 같은 도형을 놓고도 평면도, 입면도, 측면도를 그리면 모두 다른 그림이 된다. 옥수수 밭에 영글어 있는 옥수수를 보고 이광수(李光洙)는 어머니가 아기를 등에 업은 것으로 보았고, 이상(李箱)은 군인들이 배낭을 앞에 메고 열병식 하는 것으로 보았다. 초생달을 보고도 서정주 시인은 속눈썹 같다고 하고, 청나라 곽말약은 낫 같다고 말했다. 같은 죄인을 놓고도 검사와 변호사는 다른 설명을 할 수 있는 것이다. 비가 내리는 날 처갓집에 와서 오랫동안 묵고 있는 사위를 보고 빨리 돌아가기를 바라는 장모가 ‘자네 돌아가라고 ‘가랑비’가 오네’하니까 사위는 ‘아니에요. 더 있으라고 ‘이슬비’가 오는구만요’라고 했단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최남단 봉우리를 우리는 ‘희망봉’이라고 부르지만, 현지인들은 ‘재난의 언덕’이라고 부른다. 그 절벽 밑에서 재난을 당해본 사람들은 ‘재난’을 기억하고 긴 항해를 해본 사람은 조금만 더 나가면 호수같이 잔잔한 바다를 경험했기에 ‘희망봉’이라 하는 것이다. 파블로 네루다가 “사람은 누구나 조금은 realist요, 조금은 modernist”라고 했던 것처럼, 우리는 모두 ‘조금은 우파요, 조금은 좌파’인 것이다. 어떤 사람의 경험담을 들어보자. “얼마 전에 볼 일이 있어서 은행에 갔다 서류를 작성해서 제출했더니 창구 여직원이 말했다. “반대 쪽도 쓰셔야 하는데요?” 무슨 말인지 알아듣고 다른 쪽도 작성해서 다시 건넸다. 일을 마치고 창문 쪽으로 나오니까 안내하는 직원이 친절하게 말했다. “나가시는 문은 저기 반대 쪽에 있는데요!” ‘고맙소’하고 나오면서 말해주었다. “선(善)과 악(惡)만 반대고 나머지는 모두 상대인데 세상에서 선과 악은 상대라고 부르고 나머지는 반대라고 부르네.” 아까 그 여직원이 웃으면서 물었다. “왜죠?” 내가 물었다. “혹시 여자의 반대가 무엇이지요?” 그가 대답했다. “남자지요”. “그럼 낮의 반대말은요?” 다른 이가 답했다. “밤 아닌가요?” “아닌데요. 남자와 여자는 반대가 아니라 상대거든요. 우리 마음이나 몸의 구조가 모두 상대방을 위해 구성돼 있습니다. 반대가 아니란 뜻이지요. 낮과 밤도 반대가 아니라 상대구요.” 여직원이 이해했다. “아, 정말 그러네요.” 사물을 반대로 보는 것은 공산주의적인 발상이다. 공산(사회)주의는 모든 사물이나 역사적 사건을 대립(반대)개념으로 설명한다. 투쟁을 합리화하고 혁명을 정당화하기 위한 술책인 것이다. 우리들이 공산주의자는 아니면서도 생각이나 언어는 공산주의적일 때가 있다. 남자와 여자, 부모와 자녀, 정부와 국민, 기업가와 근로자, 하늘과 땅, 물과 불이 모두 반대가 아니라 상대 개념이다. 오직 선과 악만 반대 개념이다. 원래는 선(善)만 있어야 하는 것이다. 구태여 선과 악을 나눌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악이 존재하기 때문에 그것을 구별하기 위해 선을 말하게 된 것이다. 상대가 있어야 사랑도 가능하다. 남편의 상대는 아내고, 부모의 상대는 자식이다. 상대관계에서만 주고받을 수 있다. 대립 관계에서는 사랑이라는 말이 성립될 수 없다. 들어오는 문이 있다면 나가는 문도 있기 마련이다.

김형태 박사

<한남대 14-15대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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