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희 선교희] 피를 주어 살린 환자

Google+ LinkedIn Katalk +

1985년에 나는 네팔에서 빼놓을 수 없는 관광도시인 포카라시(Pokhara) 정부소유병원 응급실에서 일하고 있었다. 포카라는 네팔의 수도 카트만두(Kathmandu)에서 서쪽 해발 1천600미터의 고지대에 있는 네팔에서 세 번째로 큰 도시이며, 30킬로미터 이내에 다울라기리, 안나푸르나, 마나슬루 등 8천미터가 넘는 고봉(高峰)이 있다.

어느 날 예순 살 정도 되는 할아버지가 황급히 응급실을 찾았다. 행색을 보아하니 그는 포카라 시민 같지 않았다. 언뜻 봐도 시골 사람 같아 보였고, 실제 나이보다 더 늙어 보였다.

인도처럼 카스트 제도로 신분을 구별하는 네팔 사회에서는 입은 옷만으로도 그의 신분과 지위가 쉽게 드러난다. 그가 사는 곳이 도시인지 시골인지도 대충 알 수 있다. 하지만 나는 환자의 출신지나 신분에 상관하지 않고, 친절하게 문진(問診)을 하기 시작했다.

“어디가 아파서 오셨어요?”

“배가 아파서요.”

“언제부터요?”

“며칠 됐어요. 이상하게 잘 낫지 않아 여기까지 왔어요.” 사는 곳이 어디냐고 물으니 짐작한 대로 처음 듣는 마을 이름을 댔다. 보통 사나흘이면 올 수 있는 거리지만 아들 둘이 번갈아 부축하거나 업고 오느라 닷새나 걸렸다고 했다. 지칠 대로 지친 데다 영양 상태도 말이 아니었다.

복부(腹部)를 방사선으로 촬영하고 혈액과 소변검사를 했다. 별 이상이 없었다. 이런 경우 환자를 어떻게 치료할지 판단하기가 쉽지 않다. 할아버지의 병력(病歷)을 자세히 들어보고 진찰한 결과, 최소한 5일 전에 전복막염(全腹膜炎, panperitonitis)이 생긴 것을 알 수 있었다. 

배 전체에 염증이 퍼진 심각한 상태여서 최대한 빨리 수술을 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온몸에 염증이 퍼져 사망하게 된다. 일반적으로 증세가 나타난 지 몇 시간 이내에 수술해야 살아날 확률이 높아진다. 그런데 전복막염이면서도, 간혹 어린이나 노인에게는 위에 언급한 일반적인 증세가 나타나지 않을 때가 있는 것이 문제다.

대개는 혈액검사와 방사선 촬영만으로 판독이 되며, 심하면 혈압과 맥박이 정상 범위를 벗어나 쇼크를 일으키기도 한다. 그런데 내가 오진(誤診)을 한 것은 아닌지 의심할 정도로 할아버지는 혈압과 맥박 모두 정상이었다. 열도 없고 배는 착 가라앉아 있으며, 배를 누를 때마다 약간의 통증을 호소했다. 그런 몸으로 발병 5일 만에 병원에 올 수 있었다는 게 놀라울 뿐이었다.

이런 환자가 증상이 악화되면 치료할 시기를 놓친 것이나 다름없다. 수술을 통해 목숨을 살릴 기회는 이미 지났다는 말이다. 그렇지만 해보지도 않고 포기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어 환자의 두 아들 에게 말했다.

“아버지는 수술을 받지 않으면 백퍼센트 사망할 겁니다. 많이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카트만두의 큰 병원에 가서 수술 받으면 혹 1퍼센트라도 살아날 가능성이 있을지 모르겠어요. 그런데 지금 여기서 카트만두로 가려면 버스로 8시간이나 걸리는 데다, 간다고 해도 금방 수술해주지도 않고 검사부터 다시 할 겁니다. 그러면 시간이 더 지연되고 아버지의 생명이 위태롭게 될 거요. 당신들이 동의만 해준다면 내가 당장 수술을 해주고 싶은데 어때요.”

아들들은 생각할 일도 아니라는 듯, 즉시 수술에 동의했다.

“좋소. 그럼 내가 수술은 하겠는데, 대신 두 분의 혈액이 필요합니다. 당신들이 환자의 아들이니까 내가 수술을 하는 사이에 헌혈을 해주세요.”

아들들은 잠시 생각하는 눈치였지만 “오케이”로 답했다. 아버지가 수술을 하는데 피 한 병 헌혈 못할 자식이 어디 있겠는가 생각하고 나는 아무 의심 없이 수술실로 들어갔다.

메스를 들고 환자의 배를 열었다. 상태가 생각보다 심각했다. 천공 부위 창자를 복부 밖으로 꺼내 수술을 했다. 구석구석 변이 흩어져 있어 다른 장기들은 가능한 정도만 청소하고 소독을 했다. 그런데 봉합을 마치자마자 할아버지가 쇼크에 빠져 수혈이 필요한 상황이 되었다. 나는 간호사를 재촉했다.

“빨리 가서 피를 가져와요!”

그런데 간호사가 빈손으로 돌아오는 것이 아닌가!

“피는 어쩌고 빈손으로 와요?”

“환자 아들들이 헌혈을 안 했대요….”

나는 기가 막혔다. 아버지가 죽을지도 모르는데, 아들들이 헌혈이 무섭다며 하지 않은 것이다.

내가 의과대학에 다니던 1950년대 후반만 해도 한국에서 헌혈이 일반화되지 않아 피를 팔러 다니는 사람들이 따로 있었다. 헌혈을 하면 죽거나 병이 생기는 줄 알았기 때문이다. 

공유하기

Comments are clos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