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 회복] 유대인의 수난

Google+ LinkedIn Katalk +

유대인이 세계 역사에서 내적인 정신과 외적인 형태가 서로 조화되어 역사의 중심을 이루었던 것은 단 한 번뿐이었다. 고대 국가, 다윗과 솔로몬 시대였다. 그 후 그들은 다른 민족의 수중(手中)에 넘어가 지배를 받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인쇄기를 도입해 지식을 보급했다. 그들은 스스로 인류를 위해 헌신하고 이방인들을 계몽시키도록 창조되었다고 믿는다. 

그러나 역사 속에서 유대인이 당한 수난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그 동안 유럽 기독교에게는 예수 그리스도를 죽인 죄의 대가(代價)라고 그들을 미워했다. 유럽 교회 지도자들은 군주들과 마찬가지로 유대인들의 부(富)에 대하여 혐오감을 보였다. 기독교 일부 변증가들은 예수님 당시에도 예수님께서 일으키시는 기적을 목격했으며 예언들이 성취되는 것을 보았으면서도 그의 메시아적 사명을 인정하지 않았는데 이는 예수님이 가난하고 천한 신분이었기 때문이다.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F. Josephus)는 예수님에 대한 진실을 기록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이를 외면했다.

1216년 4차 라테란 공의회(Lateran Council)에서 교황 이노센시오 3세는 반(反)유대 칙령을 제정, 공포했다. 어거스틴은 “유대인들이 증인으로서 보호 받고 그들의 신앙을 유지할 수 있게 해줘야 한다”고 했으나 더 이상 유지되지 못했다. 1236년 교항 그레고리 9세는 탈무드(Talmud)를 폐기 처분했다. 지중해로부터 시작되어 유럽 전역으로 퍼진 흑사병은 반유대주의를 더욱 강화했다. 흑사병은 유럽 인구의 1/3을 죽게 했다. 유대인들의 악의(惡意)에 의해 퍼진 질병이라고 선동했다. 유대인들은 디아스포라(Diaspora)가 되어 유럽 각국에 흩어져 살고 있었다. 1480년 스페인은 특별 종교재판소를 설치했다. 유대교를 비밀리에 신봉했다는 이유로 34만 1천 명이 희생되었다.

종교 개혁이 일어났을 때 루터는 유대인들의 대대적인 개종(改宗)을 기다렸다. 루터의 성경 이해가 탈무드보다 못하다는 주장이 나오자 루터는 유대인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칼빈은 루터보다 호의적으로 유대인들을 대했다. 그러나 후에 유대인 추방 조치는 피할 수 없었다. 1881년에 제정 러시아는 유대인을 상대로 대학살을 저질렀다. 톨스토이, 투르게네프 등 위대한 진보주의 문학 작가들도 침묵했다. 1891년 이후 38만 명의 유대인이 러시아를 떠났다. 1881년~1914년 사이에 오스트리아에서도 유대인 35만 명 이상이 떠났다.

200만 명 이상이 미국으로 가서 거대한 유대인 사회를 만들었다. 1820년  미국에는 4천 명의 유대인들만 있었다. 남북 전쟁 당시에는 남부군에 3천 명, 북부군에  약 7천 명이 복무했다. 프랑스에서는 1890년대 유명한 드레퓌스 사건(Affaire Dreyfus)이 발생했다. 반(反)유대주의에서 나왔다. 유대인이었던 장교 드레퓌스(1859~1935)에게 간첩을 조작하여 처벌했다. 당시 작가이자 지성인 에밀 졸라(Emile Zola) 등의 노력에 의하여 사건의 진상이 밝혀져 조작되었음이 밝혀졌다. 10년 이상 프랑스의 양심을 몸부림치게 했다.

김용관 장로

<광주신안교회·한국장로문인협회 자문위원>

공유하기

Comments are clos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