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과 통일 위해 싸운 순교자 김병조 목사
신앙과 반공운동으로 민족을 지킨 목회자
조직 방법은 교회 행사와 부흥회, 기념 예배, 집회 등을 활용했다. 이와 같은 비밀조직 방식은 3·1 독립운동 당시 김병조 목사가 평북 지역 잠행 경험, 비밀연락 사무소의 설치, 그리고 백범의 비서였던 장준하가 김병조 목사를 찾아와 백범의 월남 권유를 전했던 사실, 무기를 ‘국부군’으로부터 받을 계획이었다는 김행식의 회고로 추정해 볼 때 반공 광복단의 반탁운동과 서울 임정계와의 모의가 어느 정도 이루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1946년 12월 24일 광복단 조직이 발각되면서 김병조 목사는 평북 정주에서 주모자로 체포되어 신의주 소련군 특무 사령부로 이송되었다. 이때 이경선 장로(이명룡 장로의 둘째 아들)와 최인학 장로(정주제재소 경영), 평동중학교 교장 김영섭 집사, 주동벽 집사, 김용민, 이기청은 대부분 정주중앙교회, 와읍교회 소속 교인들로 김병조와 함께 체포되었다. 이들을 통해 비밀조직과 활동내용이 밝혀졌는데 소련으로 우송할 식량 수매를 막기 위한 소비조합 파괴, 철도 파괴 활동과 북한 전역을 대상으로 교회 중심으로 반공 전단을 살포했다.
12월에 체포된 김병조 목사는 지병으로 교화소 병감에 잠시 이송되었다가 1947년 2월 20일 이후 시베리아 수용소로 유형되었다. 유형지에서 김병조 목사의 마지막 활동은 광복단원 이영호(가명)와 황해도 해주 출신 반탁운동가 김효진의 증언으로 일부 확인되었다.
1947년 김병조 목사는 시베리아 강제 노동수용소를 거쳐 1949년 쁘리쯔 바이칼호 근방 28호 수용소에 유배되었다. 증언에 의하면, 수용소에서도 그는 한인들을 모아 고국의 광복을 기원하는 예배를 드렸다. 1950년 2월 증언자 김효진과의 잠깐의 만남 이후 김병조 목사는 다른 수용소로 이감되었으며, 이 해 가을 향년 73세로 공산당에게 죽임을 당해 순교한 것으로 추정된다.
김병조 목사는 1952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순국선열로 지정되었으나 해방 후 북한에 잔류했다는 이유로 재 이북자 제외 규정(在 以北者 除外 規程)에 따라 한동안 독립유공자 훈장추서가 보류되었다. 1962년부터 8차례에 걸친 포상심사에서 유족 측은 김병조 목사가 ‘반공주의자’였음을 증명하는 사료와 기록을 제출했지만 “사망 일자와 북한에서의 행적을 알 수 없다”로 되돌아왔다. 1989년 제6공화국 때에 해방 후 반공 운동과 소련 유형이 확인됨에 따라 1990년 3·1절 기념일을 맞아 건국훈장 대통령 장(2등)에 추서되었다.
김병조 목사는 해방 후 고국에서의 생애 마지막 2년의 삶이 그보다 훨씬 길고 더 험난했던 타국에서의 삶보다 더 큰 질곡이 되었다.
일제 강점기 김병조 목사에게서 구원은 민족의 독립과 같은 의미였다. 해방 후 짧았던 분단의 삶 속에서 구원은 민족통일과 같은 의미였다. 민족의 독립을 위해 제국주의에 저항했던 수많은 선열이 그러했듯이 그는 자신의 구국을 위한 신념의 길을 걸었고, 민족 분단을 막는 길을 공산주의와의 대결이라 믿었던 수많은 사람이 그러했듯이, 짧았으나 통일을 염원했다. 머나먼 유형지에서 생을 마감하는 순간까지 ‘광복과 통일’의 염원을 내려놓지 않았다는 증언이 이를 잘 말해준다.
“主의 말씀에 사로잡힌 자를 놓아주시고 눌린 자를 自由하게 하신다 하심을 기억하옵소서. 主께서 한 번 더 矜恤을 베푸셔서 自由를 주시면 다시는 잃어버리지 않키로 뼈에 써 놓으려 하오며 한 번만 더 나라를 許諾하시면 다시는 빼앗기지 않키로 腦에 박으려 하나이다. 허다한 人民이 國家를 위하여 썩은 풀같이 犧牲된 生命과 江같이 흐른 피를 주여, 속히 거두어주시옵소서. 주여, 韓族에게 今生의 自由를 허락하실 餘日이 없으면 곧 主께서 어서 오시옵소서. 十字架의 功勞를 힘입어 祈禱하옵나이다. 아멘.”
김병조 목사는 중국을 거쳐서 만주와 나중에는 고국에 돌아와 대한민국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해 평생 기도하고 교회를 목회하며 공산주의를 막으려고 생명을 다한 진정한 순교자였다는 것을 그의 생을 통해서 확실하게 증명했다.
이승하 목사<해방교회 원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