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에서 브엘세바까지.” 이스라엘의 북과 남을 가르는 지리적 경계이지만, 그것이 하나의 생애처럼 읽혔다. 단은 시작이고, 깨어남의 자리, 불안과 기대를 안고 떠나는 젊음의 전초기지이다. 브엘세바는 끝이 아니다. 오히려 다음을 여는 쉼표, 고요한 전환의 문턱이다. 삶은 그 둘 사이의 여정이다.
어느 아침, 회색 도시의 지하철 안에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은 빛과 그림자 속에서 각자의 속도로 스쳐 지나간다. 누군가는 두려운 생각을 갖고 병원으로, 누군가는 절박한 심경을 지니고 이별로, 또 누군가는 첫 출근이라는 낯선 시간으로 나아간다. 삶은 단순한 이동이 아니다. 질문을 품은 존재가 통과하는 여정이다.
하이데거는 인간을 “존재를 묻는 존재(Das Sein zum Tode)”라 했다. 단과 브엘세바 사이, 우리는 ‘시간’, ‘기억’과 ‘갈망’이 교차하는 틈새에서 끊임없이 묻는다. 나는 누구인가? 지금 어디쯤 와 있는가? 그 물음 속에서 비로소, 생의 진실은 서서히 얼굴을 드러낸다. 단은 뜨거웠다. 무모할 만큼 뜨거운, 그러나 순수했던 열정의 광야였다. 진리를 향해, 배움을 향해 전력 질주하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모든 단은 언젠가 사막을 지난다. 광야는 책임이라는 이름으로, 혹은 반복되는 일상과 실패의 무게로 다가온다. 기대가 무너지고, 내가 누구인지조차 흐릿해질 때, 침묵의 시간 속에서 들려오는 한 음성을 들었다. “내가 너와 함께하리라.” 그 한마디가 브엘세바가 되었다. 브엘세바는 기적이 아니라 ‘기억’이다. 잊고 싶지 않았던 그 한순간, 지워져도 남는 말씀, 일상의 고요 속에 부드럽게 인도하심이다. 그 말씀으로 살아내고 견디어 어느새 가르치는 자리에 있었다. 젊은이에게 단을 열어주고, 때로는 브엘세바의 고요를 나누었다. 그러나 실은, 그들로부터 하나하나 배워 나갔다. 강의실에서 다시 단에 서고, 젊은이의 눈빛에서 투영된 오래전 자아를 보았다. 그들 속에 아직 오지 않은 브엘세바가 흐릿하게 다가온다. 삶은 원형이다. 끝은 다시 시작을 품고 오늘은 내일의 문턱이 된다. 길이 끝나는 그곳에서 삶은 다시 시작된다. 그러니 중요한 건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다.
삶은 직선이 아니라 물결이며, 진실은 늘 한 박자 느린 걸음 속에 숨어 있다.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라고 파스칼은 말했다. 바람에 흔들리되, 사유하는 존재이다. 단과 브엘세바 사이에서 우리는 그 사유의 진실 앞에 선다. “주님, 내 인생을 단에서 브엘세바까지 지켜주소서.” 이 짧은 기도 안에 삶의 모든 봄과 겨울, 고백과 침묵, 상실과 회복이 담겨 있다. 삶은 늘 미완이지만, 그 미완 속에 길이 있고 사랑이 있으며 한 걸음 더 걷게 하는 은혜가 있다.
어느새 또 한 계절이 저문다. 꽃이 지고 라일락 향이 창문을 떠난다. 한 시대의 단이 닫히고 또 다른 브엘세바가 열릴 시간이다. 그러니 멈추지 않는다. 삶의 걸음보다 더 깊은 시선, 그 걸음을 지켜보시는 이의 눈길을 신뢰하며 단과 브엘세바 사이를 다시 걷는다. 그 길 위에, 우리가 있으며 함께 걸어가고 있다.
김철경 장로
<서울노회 장로회장, 새문안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