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바른 기록과 유산의 보전을 통해서 교훈과 의미를 가지게 된다. 그러한 의미에서 과거는 현재와 소통한다. 따라서 역사를 찾고 확인하는 일은 가치가 있고, 해야만 하는 것이 특별히 인간에게 주어진 본분이기도 하다. 역사를 기억하지 않거나 기록하지 않는 곳에는 현재적 필요와 욕구를 충족하는 것을 절대가치로 여기게 되는 위험에 떨어질 수 있으며, 나아가 정체성과 옳음에 대한 기준이 없이 행하게 된다.
특별히 기독교 신앙은 역사적 계승을 통해서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계승하는 것이기 때문에 현재의 신앙을 역사를 통해서 확인하고, 그 과정에서 하나님의 섭리와 신앙의 선배들의 응답을 통해서 배우게 된다. 그러한 의미에서 이 땅에 복음이 들어와 신앙과 교회를 형성시켰고,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이 감당했던 역사적인 일들은 결코 잊힐 수 없는 것들이기에 답사하는 여정을 통해서 한국 교회에 갈무리될 수 있으면 좋겠다는 바람과 함께 이제 답사를 시작하려고 한다.

대동서시(大東書市; 옛 종로서적 자리)
초기의 선교사들은 정동에 자리를 잡고 선교를 시작했다. 그런데 선교사들이 종로로 진출한 것은 제한적이지만 선교의 자유가 허락된 다음인 1890년이다. 즉 감리교회의 아펜젤러가 정동을 벗어나서 서울 장안의 중심지인 이곳을 찾으면서부터다. 그는 종로 ‘육의전’ 거리에 집을 마련하고 그곳에서 예배를 드리기 시작하면서 종로로의 진출을 위한 교두보를 마련했다. 1890년 1월에 두 채의 건물을 구입해서 하나는 교회로, 또 하나는 서점으로 이용할 목적으로 사역을 준비했다. 1890년 가을부터 예배를 시작했지만 교회로서의 발전은 이루지 못했다. 따라서 1891년 봄부터 사람들이 찾아드는 서점으로 집회 장소를 옮겨서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여전히 집회에는 사람들이 오지 않았다.
그러던 차에 1893년 말 대영성서공회 중국지부가 중국인 매서인 두 사람을 조선에 파송함으로 아펜젤러는 예배당으로 구입했던 향정동의 집을 그들에게 내어주어 책을 팔면서 전도를 할 수 있게 했다. 그러나 중국인 매서인들은 1894년 6월 청일전쟁이 발발하자 귀국하고 말았다. 정동과 거리가 그리 멀지도 않았지만 정동에서 종로에로의 진출이 결코 쉽지 않았다. 그것은 서구권에 대한 조선 정부의 걱정이 컸기 때문에 처음부터 모든 자유를 줄 수 없었을 것이다.
선교사들은 그 집을 최병헌(한국인 최초 감리교회 신학자)에게 주어 그곳에 살면서 서점운영을 하도록 했다. 그는 고향(보은)의 집을 정리해 1894년 4월에 이 서점으로 입주했다. 그는 같은 해 10월 다시 향정동 집(중국인 매서인들이 살던)으로 거처를 옮기고 서점과 교회를 동시에 돌보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서점에 정식으로 간판을 붙였는데, 그것이 대동서시(大東書市)였다. 향정동의 집은 주일이면 예배를 드리는 곳으로 사용했는데, 그것이 현재 중앙감리교회의 효시다. 이렇게 최병헌이 머물면서 서점과 교회를 돌보면서 종로의 선교기지가 정착할 수 있었다. 선교사들은 정착시키지 못했던 것을 최병헌의 수고로 이룬 것이다.
하지만 이 서점을 1907년 대영성서공회(대한성서공회 전신)가 구입해서 문서선교의 기반을 만들었다. 한편 대동서시는 1898년 최병헌이 정동 선교기지로 이사를 가고, 1902년 아펜젤러가 사고 별세하면서 감리교출판사로 흡수되고 말았다. 여기까지가 대동서시의 역사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기독교 서점이라고 할 수 있는데 아쉽게도 그 역사는 이어지지 못했다. 다만 그 건물을 성서공회가 구입해서 성경출판과 서점으로 사용했으니, 처음 의도한 문서선교의 기지 역할은 이어진 셈이다. 또한 훗날 종로서적도 그 자리에서 영업을 하면서 비록 직접적인 것은 아니지만 대동서시의 한 기능을 감당해주었다. 하지만 서점들의 쇠락과 함께 한국의 대표적인 서점이었던 종로서적마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말았다. 또한 성서공회나 기독교서회가 강남으로 옮겨가면서 현재는 그러한 역사적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조선예수교서회(대한기독교서회) (1)
대동서시가 있었던 곳을 찾았으니 그곳에 자리했던 것들의 역사를 정리하고 가는 것이 좋을 듯하다. 같은 자리에 기독교서회가 세워져서 문서전도와 함께 근대 문화를 전달하는 역할을 했다. 기독교서회는 복음을 전하는 것을 목적으로 선교사들이 합력해 세운 연합기관이다. 창립 목적은 “조선어로 기독교 서적과 전도지와 정기간행물의 잡지류를 발행하여 전국에 보급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단체는 단지 인쇄와 출판을 통해서 복음을 전한 것만으로도 그 의미가 크다. 그런데 기독교서회는 한국의 출판문화는 물론 근대화의 길을 열어가는 다양한 역할을 했다.
초기 기독교서회는 발행하는 책자와 문서들을 통해서 많은 개종자들을 얻었다. 특별히 이원긍, 이상재, 이승만 등과 같은 이들이 기독교서회에서 발행한 전도문서의 도움을 받아 개종할 수 있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기독교서회는 전도문서나 신학서적만이 아니라 계몽을 위한 잡지(새가정, 어린이 벗)와 교양과 상식, 문학, 어학 등 다양한 서적을 출판해서 한국의 근대화를 이끌었다. 물론 초기에는 기독교 신앙의 기초와 근본에 대한 교재들을 중심으로 출판했지만 현실에서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보급함으로써 여러 측면에서 근대화에 큰 역할을 했다.
이종전 박사
인천기독교역사문화연구원 원장
개혁파신학연구소 소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