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번역과 민족독립, 종로의 두 흐름”

대한성서공회 (2)
국내에서 성경 출판을 위한 <상임성서위원회>가 언더우드의 리더십으로 조직된 것은 1887년 2월이다. 이 조직이 1893년 5월에 이르러서 <상임성서실행위원회>로 개편이 되면서 본격적인 성경보급을 위한 일을 시작했다. 실제로 국내에 들어온 선교사들이 성경번역의 필요성과 긴급성을 느끼면서 직접적으로 성경출판을 위한 노력을 하기 시작한 것도 이때였다. 장로교회 선교사인 언더우드를 비롯해서 초기 선교사들 가운데 게일, 감리교회의 아펜젤러와 스크랜턴, 그리고 성공회의 트롤로프 신부 등이 번역자회의를 별도로 구성해 언더우드가 회장을 맡아 국내의 성경보급을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 그러한 의미에서 이 위원회가 대한성서공회의 효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번역자회의는 의욕은 있었지만 전문성과 선교 사역과 함께 병행하는 번역작업이 그렇게 쉽지만은 않았기 때문에 성과가 늦어질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그것에 비례해서 번역의 성과는 미미했다. 그러다가 1895년에 미국 남장로교회 선교부가 파송한 레이놀즈가 동참하면서 성경번역사업에 추진력을 갖게 되었다. 그는 성경원어에 대한 실력도 특출했지만 번역사업에 대한 소명과 열정 또한 남달랐기 때문에 사실상 성경전서의 완역과 출판을 하기까지 그의 수고는 독보적인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때부터 영국성서공회가 서울에 성경보급소를 설치했고 조선에 성경을 보급하는 주도권을 확보했다. 이듬해인 1894년 10월에 영국성서공회는 우리나라 최초의 서점이라고 할 수 있는 대동서시에 성경 보급소를 다시 설치해서 국내의 성경판권을 행사했다. 1895년에는 영국성서공회가 보급소를 조선지부로 확대 개편해 조선에서 출판하는 성경의 판권을 확실하게 확보했다. 1900년 9월 9일에 새롭게 번역한 최초의 신약성경을 출판했다. 이때까지 활동해온 <상임성서실행위원회>는 1903년에 이르러서 해체하고 <성서위원회>로 개편했다. 1906년 9월 공인된 신약성경을 발행했고, 1911년 3월에 구약을 완역했으며, 구약전서와 신구약을 합본한 성경전서를 1911년에 발행했다. 이것은 우리나라 최초의 공인성경전서의 출판이다.
성경전서를 발행한 1911년에 성서회관 건물을 신축하고 성서위원회가 독립된 기관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판권에 대해서는 1918년 <성서위원회>는 영국성서공회가 전담하고 함께 했던 미국성서공회는 필리핀성서공회를 전담하기로 하고 1919년 4월 완전히 철수함으로 영국성서공회가 전담하는 계기가 되었다. 다시 1938년 조선성서공회로 개편함으로써 비로소 완전히 독립된 기관이 되었다.
이 과정에서 일본은 영국이 성서공회에서 손을 떼도록 하는 정치적인 작업을 계속했다. 이것은 일본이 식민지를 하고 있는 조선에 외국의 직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공인단체가 생기는 것에 대한 불만과 염려 때문이었다. 결국 1941년 3월 일본 정부에 의해서 영국성서공회가 완전히 철수할 수밖에 없게 되었고, 이때부터 조선에 성경을 보급하는 것은 조선성서공회가 독자적으로 시행하게 되었다. 그러나 조선성서공회가 사업을 전담하자마자 1942년 일본은 성서사업 자체를 할 수 없도록 강제로 조치했다.
1945년 해방과 함께 영국성서공회가 다시 조선에 돌아와서 영국성서공회 조선지부로 재건했다. 이렇게 해서 현재의 대한성서공회는 처음부터 영국성서공회의 역할에 의해서 세워졌고 해방 후에도 그들에 의해서 재건되었다. 그러한 의미에서 한국성서공회는 영국성서공회의 산파역할을 통해서 존재할 수 있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한편 1970년 종로에 세워진 지하 2층, 지상 6층의 건물을 지어서 사용하다가 1995년 서초구에 새로운 성서공회회관을 짓고 이전해 강남시대를 열었다.
신간회 (1)
옛 종로서적과 대한기독교서회, 성서공회 건물에서 종로 3가 쪽으로 조금 진행하다 보면(YMCA건너편) 인도에 까만 새김돌 하나가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신간회가 자리했던 곳임을 확인할 수 있게 하는 새김돌이다. 이제는 이름조차 낯설지만 그곳은 1927~1931년 사이에 독립운동단체로서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즉 좌우합작의 단체인 신간회가 활동하던 중앙본부가 있었던 곳이다.
신간회의 활동기간이 짧았기 때문에 그 존재감과 영향력이 미미하게 느껴지기 때문에 특별한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신간회는 분명히 당시 우리 역사에서 나름의 역할을 했다. 신간회를 통해서 사상의 다름, 행동의 다름, 그러면서도 함께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인간이 형성하고 있는 사회와 국가라는 것을 깨닫게 했다. 각기 다른 사상을 갖고 있지만 국가(민족)를 위한 목적은 같았기 때문에 함께할 수 있었던 단체가 신간회였다.
그러나 지금 그곳에서 만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다만 서울시가 신간회가 자리했던 곳에 새김돌을 만들어놓아서 지나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곳에 신간회가 자리하고 있었음을 알게 해주고 있을 뿐이다. 그나마 무심코 지나친다면 모를 일이다.
특별히 신간회의 중심에는 이상재라고 하는 크리스천 민족지도자가 있었기에 관심을 갖게 된다. 그는 개종을 한 다음에 민족지도자로서 좌우의 사상을 뛰어넘어 존경을 받게 되는 특별한 인물이 되었다. 그러한 그의 모습이 신간회의 초대 회장을 맡게 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어떻든 “신간회(新幹會)는 1927년 2월 15일에 사회주의, 민족주의세력들이 결집해서 창립되어 1931년 5월까지 지속한 한국의 좌우합작 독립운동단체”인 것은 분명하다. 훗날 역사가들은 신간회의 정체성에 대해서 이렇게 해석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신간회는 정치, 사회 지도자들과 여러 종교단체가 함께 결성한 단체다. 어떤 특정 종교나 사상을 가진 사람들만이 모여서 결성한 단체가 아니라는 의미이다.
이상재 선생에 관해서는 앞으로 찾아보게 될 한국 YMCA를 돌아보면서 이야기하기로 하고, 여기서는 이상재가 초대 회장으로 추대되어 활동한 신간회에 관해서만 생각해 보기로 한다.
이종전 박사
인천기독교역사문화연구원 원장
개혁파신학연구소 소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