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은 신앙의 자리] 종로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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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의 조선, 청년의 응답

근대의 새벽을 열다… 황성기독교청년회 창립 이야기

YMCA(1)

YMCA가 창립되는 20세기 초 조선의 현실은 암울했다. 당시 조선은 풍전등화와 같은 현실에 직면한 상태였다. 자폐적인 정책과 미래를 내다보지 못하는 지도자들의 한계, 그리고 세계의 열강들은 식민지를 확보하기 위해 혈안이 된 소위 제국주의시대였지만 조선은 여전히 동방의 고요한(?) 나라였다. 당시 조선을 알게 된 서양인들의 표현처럼 ‘은둔의 나라’가 조선이었다. 그러한 현실에서 민족적 자각의식을 갖게 된 이들이 다름 아닌 선교사들을 만난 신지식인들이었다. 

그들은 대부분 개종과 함께 신지식인으로서 조선의 미래를 염려하는 지도자들이 되었다.

  그들이 중심이 돼서 결성했던 것이 독립협회(1896. 7.~1898. 12.)다. 

즉 서재필, 이상재, 윤치호, 남궁억 등이 주역을 이루어 결성했다. 하지만 그들의 순수한 의지와는 달리 조선정부에서 볼 때 그들은 반역에 가까운 일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을 것이다. 분명히 조선정부가 있음에도 그들이 사용한 단체명이 독립협회였으니, 그것만으로도 조정의 견제 내지는 탄압을 받을 수 있는 일이었다. 

결국 이 단체는 불과 2년여의 활동을 끝으로 조선정부에 의해서 강제로 해산을 당했다. 당연히 그 과정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한 사람들은 모두 투옥되고 말았다. 그들이 출옥하게 된 것은 1904년 러일전쟁 덕이기도 했다. 

이처럼 조선의 신지식인들이 방황하고 있을 그즈음 국내에서 활동하고 있던 선교사들이 조선의 현실을 보면서 복음을 전하는 일과 함께 조선을 위해서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찾고 있었다. 

특별히 게일(James S. Gale), 헐버트(Homer B. Hulbert), 질레트(P. L. Gillet) 등과 같은 이들은 선교의 현장에서 조선의 현실을 지켜보던 중 조선의 미래를 위해서 젊은이들을 이끌어주는 것이 급선무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게일이 중심이 돼서 1903년 10월 28일 황성기독교청년회라는 이름으로 젊은이들을 신앙으로 훈련시키면서 계몽할 수 있는 역할을 감당할 수 있는 단체를 창립했는데, 이것이 YMCA의 효시였다.

/서울YMCA 제공

창립 당시 임시 의장은 헐버트가 되어서 초대 회장을 게일, 부회장은 헐버트 자신이, 그리고 총무는 질레트 선교사가 각각 맡았다. 이렇게 시작한 YMCA는 조선의 암울한 미래를 걱정하면서 방황하고 있는 이들이 결집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단체가 될 수밖에 없었다. 한성기독교청년회는 시작과 함께 공상교육(工商敎育), 체육활동을 중심으로 국민들의 곁으로 다가가면서 그들로 하여금 현실을 직시할 수 있도록 했다.

당시 조선은 철저한 신분사회였다. 즉 사농공상(士農工商)으로 표현되듯이 직업과 신분을 같은 것으로 여기는 의식에 의해서 철저한 신분사회를 형성하고 있는 현실에서 실용적인 직업의 가치를 고취시키기 위해서 공상(工商)중심으로 교육하면서 체육활동을 보급함으로써 육체적인 노동을 천시했던 사회적 정서를 극복할 수 있도록 했다. 그러한 의미에서 YMCA는 조선의 근대화운동을 주도한 최초 시민단체였다고 할 수 있다. 

당시 사회적 현실에서는 이러한 운동을 주도할 수 있는 또 다른 단체는 기대할 수 없었기에 거의 유일한 것이었다고 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이 단체를 결성시킨 것은 선교사들이 중심이었지만 실제로 이 단체를 주도적으로 이끌면서 사업 목적을 위해서 헌신한 사람들은 조선의 신지식인들이었다. 이상재, 윤치호, 이승만, 김규식, 신홍우, 그리고 현흥택과 김정식 등이 중심이 돼서 계몽과 필요한 교육을 맡아서 함으로써 구국을 위한 인재양성을 주도하면서 YMCA가 감당해야 할 목표를 분명히 했다.

그 결과 YMCA는 창립부터 그 존재감을 뚜렷하게 보여줬다. 즉 창립과 함께 교양계몽(敎養啓蒙), 개화자강(開化自强), 인재양성, 평생교육을 실시함으로써 가르치는 교사들과 YMCA에서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 민족의식과 애국정신을 선도했다. 작지만 이 운동은 자연스럽게 민족이 처한 상황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를 깨닫게 했다. 그것은 을사늑약을 반대하고, 강압된 고종황제의 양위(讓位)를 반대하며, 친일세력이 결성한 일진회와 대결하면서 항일운동의 보이지 않는 구심점 역할을 했다. 

이렇게 표면적으로 YMCA의 정체가 나타내게 되면서 국민적 공감대를 형성하게 됨으로써 많은 사람들이 YMCA에서 활동하기를 원하게 되었다. 상류층 신지식인들이 중심이 돼서 시작했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평민들이 참여하면서 더 역동적인 단체로 발전했다.

서울YMCA제공

이종전 박사

인천기독교역사문화연구원 원장 

개혁파신학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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