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의 독립을 향한 발걸음
2·8독립선언과 3·1운동의 숨은 거점, 청년의 집결지
YMCA (2)
서울 YMCA회관에 들어서면서 벽에 검은색 비석이 부착돼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 내용은 <3·1운동기념비 : 종로 YMCA, 이 기독청년회관(YMCA)은 민족운동의 본거지로서 3·1독립운동을 준비하였던 곳>이라고 되어 있다. 지나치면 그만일 것이나 살피면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된다. 비록 비석은 작고, 공간마저 아쉽게 벽에 붙여놓았지만 이곳이 해방 이전에 어떤 곳이었는지를 증거해주고 있다.
이곳은 국내에서 일어난 항일운동의 한 본거지로서 역할을 했다. 특별히 계몽운동에 주력했던 곳이었기 때문에 이곳에서 당시 우리나라가 처한 상황을 깨닫게 되었고, 그것에 대해서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인지를 고민하면서 의기투합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한 의미에서 항일운동의 동기와 기폭제로써의 역할을 하는 것이 서울 YMCA이다. 또한 3·1독립만세운동을 준비했던 곳도 이곳이라는 점에서 작은 비석이지만 그 앞에 한참이나 서서 생각하게 한다.
1919년 우리나라를 지배하는 일본의 심장인 동경에서 2·8독립선언문이 낭독된 사건은 우리만이 아니라 일본을 놀라게 한 사건이다. 국내가 아닌 일본에서 있었던 사건이지만, 그것은 재일조선인 YMCA에서 주도한 것으로 그 중심에는 김정식이라는 인물이 있다. 그는 바로 서울 YMCA가 일본에 파송해서 동경에 조선인 YMCA를 창립하게 한 인물이다. 그가 중심이 돼서 창립한 동경의 YMCA회관은 조선인 유학생들의 모임 장소가 되었다. 그곳에 모여든 유학생들은 자연스럽게 당시 조선이 처한 상황을 누구보다 잘 알 수 있었기에 조국의 미래를 걱정했다. 그들은 그곳에 모여서 시국과 조국의 현실에 관해 열띤 토론하면서 자신들이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고뇌했다.

/서울YMCA 제공
그들은 신지식인으로서 자신들이 감당해야 하는 책임에 대해서 자각했고, 그것을 행동으로 옮겨야 했다. 지식인으로서 책임이라는 자각은 스스로를 부정할 수 없게 했기에 많은 유학생들은 그해 2월 8일 동경 YMCA회관에 모여서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만세를 외쳤다. 이것이 2·8독립선언 사건이다.
그러나 그 중심에 있던 젊은이들은 그것으로 멈추지 않고, 자신들이 시작한 독립운동이 일회적 사건으로 역사에 묻혀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하면서 조국에 돌아와 독립선언을 이어갔다. 즉 동경에서 있었던 2·8독립선언에 참여했던 젊은이들 360여 명은 조국으로 돌아와서 일본에서 있었던 소식을 전했고, 서울에서도 독립만세운동이 이어져야 할 것을 독려했다. 그러한 의미에서 그들은 1919년 3·1독립만세운동의 실제적인 도화선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서울 YMCA는 개화파 지도자들이 중심이 돼서 청년학생들을 통한 국가의 미래를 준비하고 있었다. 따라서 YMCA회관은 사회와 국가의 미래에 대해서 염려하는 사람들이 모임을 가질 수 있는 공간이 되어주었다. 다양한 사람들이 이곳에 모여서 사회 계몽과 함께 국가의 미래를 걱정하는 시간을 가졌고, 그러한 모임은 결실을 맺게 되었는데, 그것은 3·1독립만세운동으로 나타났다. 1919년 3·1독립만세운동의 중심에는 서울 YMCA가 있었다는 의미다. 실제로 당시 민족대표로 선정되어 독립선언문에 서명을 한 사람들 33인 가운데 9명이 서울 YMCA의 인사들이었다는 사실은 그 사실을 증명해준다.
선천의 신성학교를 설립해서 청소년 교육을 하면서 YMCA의 중심에 있었던 이상재, 박승봉과 동지로서 청년계몽을 이끌었던 양전백, 이사로서 YMCA를 이끌면서 계몽 강연의 명 강사로 활동했던 정춘수와 최성모, 역시 이사로 섬기면서 종교부 위원장을 맡았던 오화영, 회원부 간사로서 학생들을 맡아서 지도했던 박희도, 구한말 조선군대의 군인이었으며 YMCA에서는 체육부를 담당했던 이필수, 그 밖에 열성을 갖고 YMCA를 섬기면서 활동했던 이갑성과 박동완, 장로로서 오산학교를 세워 민족의 미래를 자라는 세대가 열어가도록 민족운동을 이끌었던 이승훈 등 9명이 3·1독립만세운동에서 민족대표 33인으로 활약으로 했다. 3·1독립만세운동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이곳은 거사를 준비하는 장소가 되었다. 또한 YMCA인사들이 그 운동의 중심에서 역할을 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 회관이 갖는 의미가 특별하다.

/서울YMCA제공
또한 서울 YMCA는 암울한 식민지시대에 민족의 미래를 깨우쳐 갈 수 있는 방법들을 제시하면서 계몽운동을 주도했다. 그 중에도 조선후기에 몰락하는 국가와 사회의 현실을 직시할 수 있도록 계몽운동을 이끌었다. 노름과 음주, 미신을 타파해야 국가의 미래가 있음을 제시하면서 대안으로 잘 살 수 있는 방법들을 가르쳤다. 그 대표적인 것이 ‘농촌강습회’다. 계몽교육과 함께 당시 우리나라 산업의 중심인 농업을 통해서 잘 살 수 있게 하기 위해서 노력했다. 즉 농사기술을 가르치고, 생산성이 높은 새로운 종자를 보급하면서 협동조합운동을 일으켜서 자립과 자조의 기반을 만들어 가도록 했다.
한편 서양의 스포츠를 보급하는 일 역시 YMCA의 역할이었다. 선교사들이 운영하는 학교에서 서양의 스포츠가 소개되었지만 전국적인 대회를 열어 그 대회에 참여하게 하고, 일반인들에게도 보급하는 역할은 YMCA가 담당했다. 농구, 유도, 탁구, 배구와 같은 종목의 전국대회를 만들어서 참여하게 해 민족의 단결과 의식의 고취를 주도했다.
이종전 박사
인천기독교역사문화연구원 원장
개혁파신학연구소 소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