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이도의 문학산책] 생명의 언어, 죽음의 언어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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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토벤의 유언장 ②

나의 문학적 성찰이란 언어에 의해 표상된 작품을 통해 되돌아보는 일이다. 내 머릿속엔 몇 개의 어휘가 있을까. 어떤 부류의 어휘들이 많을까. 빈약한 어휘를 문학적 언어로 변용하고 활용해 지은 작품들이 결국은 내 시와 산문의 어휘집(語彙集)이 된 것이다.

서양의 「언어철학엔 “인간이 언어를 지어내 사용하는 순간부터 그 언어의 노예(예속)가 된다” “인간이 언어를 모르면 생각할 수 없다”라는 등의 명제가 있다. 동양에도 주자의 언어관에서부터 퇴계, 율곡 선생에 이르기까지 철학적인 언어관이 있다. 특히 율곡의 언어사상일체론」은 “언어가 곧 생각이다”라고 말한다. 이는 언어를 모르면 생각할 수조차 없다는 서양의 그것과 같은 맥락이다.

나의 어휘집의 언어들, 즉 시편들은 문학적 상상력을 비유로써 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예수께서…비유로 저희가 알아들을 수 있는 대로 말씀을 가르치실 때 비유가 아니면 말씀하지 아니하시고…”(막 4:33~34)라고 말씀하신 기록이다. 말과 관련해 이렇게 비유하고 있다.

“경우에 합당한 말은 아로새긴 은쟁반의 금사과니라(잠 25:11)”

“선한 말은 꿀송이 같아서 마음에 달고 뼈에 양약이 되느니라”(잠 16:24)

니체의 언어관을 엿볼 수 있는 그의 시 ‘언어’를 읽어보자.

생생한 언어가 나는 좋다/그러한 언어는 매우 기분 좋게 솟아올라/

점잖게 고개 숙여 인사를 하고/서투르다고 말할지라도 사랑스럽고/

피가 통하고 본심에서 숨을 쉴 수가 있고/귀머거리의 귀에까지도 전해지고/돌돌 말렸다 싶으면, 당장 훨훨 날고/언어는 무엇을 하던 – 언어는 즐겁다/그러나 언어는 언제나 생생한 생물체로서/때로는 않고, 때로는 낫는다

언어의 작은 생명이 죽으려 할 때/너는 그것을 가볍게, 부드럽게 붙잡아야 하며/악에 찬 시선을 던지기만 해도 그것은 죽는다. 그러고 보니 흉하게/영혼도 없고, 빈약하고 차갑게 드러누워/죽음에 들볶여서

그 작은 시체는 흉한 모습으로 변해버린다.

죽은 언어는 추악한 것이다/메마르고 공허한 딩동댕 이다./크고 작은 언어를 죽이는/모든 흉측한 사업은, 오직 화가 치밀뿐이다!

박이도 장로

<현대교회•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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