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이슈] 한국교회 순교자들 (4) 남궁혁 목사 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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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양욱과 남궁혁  목사의 교차된 역사

음악가·사진가, 예술가 남궁요설의 삶

김일성의 생모 강반석의 혈족인 강양욱 전 부주석은 평양장로회신학교를 졸업하고 해방 전까지 평양에서 장로교 목사로 활동하다가 분단 이후 북한 인민위원회 상임위원장을 지내는 등 공산주의 권력의 핵심부에 있었다. 남궁혁 목사는 강양욱으로부터 북한 정권 참여 제의를 받았다고 남궁혁 목사의 손자 되는 남궁건(미국명 토니 남궁) 전 부소장(UC 버클리대 동아시아연구소)은 말했다.

그는 “6·25 한국전쟁 직전 김일성 북한 주석이 강양욱을 보내 정권에 참여해 달라고 요청한 것으로 안다. 강반석은 원래 독실한 기독교 집안 출신이며, 김일성 본인도 나중에는 미국 목사들과 성경을 논하고 ‘아멘’이라는 말과 함께 기도하기도 했다”라고 말했다.

2012년 토니 남궁 전 부소장은 남궁혁 목사의 모교인 미국 버지니아주 리치몬드 유니온 신학대학원에서 할아버지를 조명하는 강연을 했다. 이 자리에서 그는 “남궁혁에게 기독교 신앙은 외세침략에 대한 대응”이라고 규정했다. 또 식민 통치기에 남궁혁이 신학공부에 접어든 사실 역시 “각양각색의 정치적 갈등과 사회적 악습에 대한 해답을 찾고자 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남궁건 전 부소장은 북미 접촉의 중재자로서 자신의 삶이 남궁혁 목사의 생애와도 운명적 연결이라고 믿는다. “할아버지는 언제나 뒤에서 교회통합을 위해 묵묵히 제 역할을 했고, 나 또한 한반도 평화와 효과적인 외교를 위해 민간 또는 비공식 영역에서 침묵의 메신저 역할을 했다. 어쩌다 보니 내가 북미 교섭뿐만 아니라 남북관계, 통일문제에까지 관여하게 되었는지 나 자신도 의아해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이념적으로 갈라진 남과 북을 잇는 작업이 할아버지의 유업과 맞닿아 있다고 본다.”

한편 한평생 음악가와 사진작가로 활동하며 미국 내 대표적인 한인 예술가로 평가를 받았던 남궁요설 선생 곁을 10년 넘게 지키며 그의 활동을 도왔던 부인 모니카 남궁 씨는 “선생께서 내가 성경을 읽어드리는 가운데 편안하게 눈을 감으셨다”라고 말했다. 유가족으로 부인 모니카 남궁 씨와 첫 번째 일본 부인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린 남궁 씨 등 두 딸이 있다. 장례식은 아카시아 장례식장에서 평강장로교회 박은일 목사의 집례로 진행되었다.

1919년 4월 24일 전라도 광주에서 태어나 다섯 살 때 평양으로 옮긴 남궁요설 선생은 남궁혁 목사의 아들이다. 또 독립운동가이자 언론인, 교육자이며 한국 최초의 신문인 <황성일보>의 사장을 지낸 남궁억 선생이 그의 큰아버지였다.

슈베르트 음악을 남달리 좋아했던 남궁요설은 열세 살 때 슈베르트 명 가곡 ‘보리수’ 가사를 “성문 앞 우물가”로 시작하는 우리말로 번역했으며, 일본에서 성악(베이스)을 전공한 뒤 중국 상하이 교향악단 매니저를 지내기도 했다. 1947년 워싱턴 대학으로 유학한 남궁요설은 사진작가로 변신해 ‘신사실주의 사진’의 지평을 열며 근대 풍경 사진의 원조인 안셀 아담스와 함께 사진예술에 정진했다.

특히 자연을 소재로 한 남궁요설의 작품은 순간을 포착, 마치 유화를 그려놓은 것처럼 독특한 사진예술의 극치를 보여준다는 평을 받았다. 생전에 많은 작품 활동집을 내기도 했던 남궁요설은 그 후 성악가에서 사진작가로 변신한 1950년대 후반부터 촬영 활동을 중단했던 2000년대 초반까지 100여 점을 담은 영문 회고록을 내기도 했다.

미국 최대 발행 부수를 자랑하는 월스트리트 저널(WSJ)은 기사를 통해 회고록을 상세히 보도하면서 “남궁요설 작가의 작품은 연금술적인 아이디어가 대자연과 조화를 이루었다”라고 극찬했다.

이승하 목사<해방교회 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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