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은 신앙의 자리] 종로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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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MCA와 민족운동의 선구자, 이상재 

YMCA 최초 한국인 총무, 민족의식과 독립정신을 일깨우다

이상재 <2>

독립협회의 강제해산과 함께 투옥되었던 중심인물들은 국가의 미래를 담보할 수 없는 상태에서 가만히 있을 수 없기에 계몽활동을 그만둘 수 없었다. 당연히 정치적인 의식을 배제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들의 활동을 주시하고 있는 수구세력들은 눈엣가시와 같은 존재들이었다. 기회만 보고 있던 그들은 결국 독립협회 회원들을 정치세력으로 간주해 개혁당으로 몰아서 전원 투옥을 시켰다. 

하지만 이 사건은 이상재를 비롯해서 독립협회 회원들과 당시의 개혁적인 입장에 있었던 정치인들이 같은 감옥에 투옥됨으로써 아무도 예측할 수 없는 역사가 만들어지게 되었다. 예를 들어 당시 고관의 직책을 가지고 있었던 이원금(법무협변), 유성준(내무협변), 홍재기(개성군수), 이승인(부여군수) 등 12명의 정치인들이 투옥되었다. 이들이 감옥에 있는 동안 감리교 선교사인 벙커(D. A. Bunker)가 주일마다 감옥을 찾아가 예배를 인도하면서 전도했는데 그곳에서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났다. 그들 12명 전원이 회심을 하고 예수님을 믿겠다고 자원하게 된 것이다. 그들이 옥중에서 신앙을 갖게 되고, 감옥에 있는 동안에는 제한적이기는 하지만 선교사들에 의해서 양육을 받았다.

그들이 자유의 몸이 될 수 있었던 것은 1904년 러일전쟁이 일어나면서였다. 전쟁 덕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들 일행이 출옥하게 되자 곧바로 장로교 선교사인 게일(James Scarth Gale)을 찾아가서 자신들의 입장을 전했다. 옥중에서 개종을 했지만 기독교와 복음에 대해서 아는 것이 일천하니 더 배우기를 원했다. 그들의 간절한 청원에 대해서 게일은 기꺼이 허락했고 성심껏 가르쳤다. 그들은 게일이 목회하고 있는 연동교회에 출석하면서 미래의 한국교회 지도자로 성장할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각각 처한 곳에서 한국교회를 위해서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는 일꾼들이 되었다.

1905년 이상재는 의정부참판으로 발탁이 되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감옥에 있었던 그가 의정부참판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해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됨으로써 수구파의 중심에 있던 민영환이 자결을 했다. 그 여파로 의정부참판이었던 이상설이 갑자기 사임을 함으로 그 자리를 대신할 수 있는 인물로 그가 발탁 받은 것이다. 그가 의정부참판으로 있게 됨으로 외교적인 정세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그는 그 정보를 이용해서 의정부참판으로 있었던 이상설과 이준과 상의해 고종의 재가를 받아 밀사를 파견하기로 했다. 즉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의에 이준을 고종의 밀사로 파견한 것이다. 그 중심에 이상재가 있었다는 것을 여기서 꼭 기억해 두어야 할 것이다.

또한 그는 개종한 이후부터 YMCA운동에 참여했다. 즉 1906년에 이미 YMCA의 교육위원장, 1908년에는 종교위원장, 1913년에는 총무를 맡아서 YMCA를 이끌었다. 그가 총무를 맡게 되었을 때 이미 만 63세였으니 당시로서 노인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YMCA를 이끄는 총무(현재의 회장에 해당하는 직책)를 맡았다.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하는 운동이라는 특성이 있지만 개의치 않고 한국의 미래인 청년들을 교육하고, 건강하게 자랄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자신이 할 수 있는 마지막 일이라고 생각해 주도적으로 한국의 YMCA를 세워갔다.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이 단체를 이끌어가면서 민족과 독립의식을 깨우쳐주었다.

그러한 노력은 1919년 3·1독립만세운동으로 나타났다. 이상재는 3·1독립만세운동과 관련해서 또 한 번 투옥을 당했다. 비록 그 자신이 민족대표로 직접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YMCA가 그 중심에 있었기 때문이다. 거사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그들이 모임을 갖거나 준비하는 일들은 대부분 YMCA회관을 주로 이용했다. 또한 거사의 중심에 YMCA가 있었다는 것은 민족대표로 참여한 기독교 지도자들 가운데 상당수가 YMCA를 이끌고 있던 지도자들이었기 때문이다. 즉 정춘수, 최성모, 오화영, 박희도, 박동완, 이필수, 양전백, 이갑성, 이승훈 등 9명이다. 전체 기독교 대표 16명이었으니 그 절반이 넘는 사람이 YMCA와 함께 했던 인사들이라는 것은 지나칠 수 없는 사실이다.

뿐만 아니라 이상재는 1920년 민립(民立)대학교 설립을 위해서 창립된 <조선교육협회>의 회장으로 선출되어서 계몽과 일본에 대한 저항운동을 주도했다. 그것을 위해서 지방순회강연회, 조선어강습회, 각종 운동회, 학교에 채용되어 있는 일본인 교사들을 축출하는 운동 등을 전개했다. 1924년에는 보이스카우트를 창립해서 초대 총재로 취임했고, 역시 그의 관심은 국민을 깨우치고 일제에 저항하는 운동을 전개했다. 그 중에도 물산장려운동, 절제운동, 그리고 복음을 전하는 전도까지 고령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국가의 미래를 위한 열정은 식을 줄 몰랐다. 한편 1924년에 조선일보 사장에 추대되었다. 그가 사장에 취임하면서 당시 조선일보는 탈바꿈을 했다. 즉 그때까지 조선일보는 친일파신문이라고 할 만큼 일본의 대변지와 같다는 평을 받았다. 하지만 그가 사장에 취임하면서 민족지로 재탄생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1927년 2월, 신간회 초대회장이 되었는데 안타깝게도 그 다음 달 3월에 별세함으로 파란만장한 그의 생애는 조선의 독립을 보지 못한 채 마감되었다.

이상재는 YMCA를 주도한 지도자로서 최초의 한국인 총무가 되어서 민족의식과 독립의식을 고취시키면서 식민지시대의 민족적 자각을 위해서 헌신했다. 그의 활동은 절망가운데 있었던 조선인들에게 미래에 대한 소망과 함께 민족에 대한 자긍심을 지킬 수 있도록 했다. 그러한 그의 업적은 1927년 그의 죽음과 함께 증명되었다. 식민지시대임에도 그의 장례식은 우리나라 최초 사회장으로 치렀으며, 발인식을 치른 서울역 광장에 당시 20만 명이 군집했다. 그의 주검이 기차에 실려 선산 충남 서천까지 운구되는 과정에서 기차가 서는 역마다 수많은 군중이 그의 마지막 길을 슬퍼했다는 사실이 당시 우리 국민들의 그에 대한 존경심이 얼마나 컸는지를 알게 한다.  

이종전 박사

 인천기독교역사문화연구원 원장 

 개혁파신학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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