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 땅의 무서움을 경험한 자리
데살로니가는 지금도 그리스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입니다. 알렉산더 왕에게는 여동생이 있었는데 이름이 테살로니키였습니다. 테살로니키는 훗날 알렉산더의 장군 카산더와 결혼했는데, 그가 도시 하나를 건설하고서 그곳을 아내의 이름을 따라 데살로니가로 정했습니다.
데살로니가는 마케도냐의 수도 펠라 보다 더 번성했습니다. 로마의 도시가 되고 난 후 마케도냐를 동서로 잇는 에그나티아 가도가 만들어지면서 도시는 제국 동방 물류의 핵심으로 떠올랐습니다. 로마시대 데살로니가는 크게 번창해서 도시와 도시 주변의 도로는 줄곧 물건을 실은 마차들로 가득했습니다. 그래서 한때 이 도시로 정치적인 망명을 했던 키케로는 에그나티아 가도에 교통체증이 심하다고 불평하기도 했습니다. 로마 사람들은 번성하는 데살로니가에 자치의 자유를 주고 우대했습니다. 그렇게 두는 것이 로마에게도 큰 이득이었기 때문입니다.
빌립보를 떠난 바울 일행은 에그나티아 도로를 따라 150킬로미터 서쪽에 있는 데살로니가에 도착했습니다. 바울은 유대인 회당에서 예수를 전했습니다. 그때 바울은 야손이라는 사람의 집에 머물렀는데 도시의 불량한 패거리들이 유대인들의 사주를 받아 바울 일행을 “천하를 어지럽게 하는 사람들”이라고 모함하고서 통치자들에게 고소했습니다.(행 17:6)
당시 일단의 유대인들이 소동을 일으킨 죄로 클라오디우스 황제의 로마에게 쫓겨나 제국의 동쪽으로 이동해 와 있었는데, 그들을 빗대 모함을 한 것이었습니다. 도시의 통치자들은 별스럽지 않게 여기고서 보석금을 받고 야손과 일행을 풀어주었습니다.(행 17:9)
그러나 이 일은 바울 일행에게 거대한 헬라 문화와 제국의 현실을 직면하게 한 사건이었습니다. 그는 곧 도시를 떠나야 했습니다. 급하게 떠나느라 이제 막 세워진 교회의 성도들을 단속할 여유를 갖지도 못했습니다.
덕분에 새로운 교회 공동체와 그 주변에는 바울에 대한 오해가 쌓였습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의 경험이 두렵기도 했고 무엇보다 안타깝기도 했습니다. 바울의 길은 그렇게 당대 세계의 중심, 헬라의 본거지로 다가갈수록 힘들어만 갔습니다.
강신덕 목사
<토비아선교회, 샬롬교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