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로들의 생활신앙] 다산 정약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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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네스코는 2012년에 세계적인 기념 인물로 루소, 헤르만 헤세, 드뷔시 및 정약용을 선정했다. 한국인으로는 정약용이 처음 선정된 인물이다. 성호 이익 선생의 유고집을 읽고 실학(實學)에 꿈을 키운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1762-1830)은 가톨릭(天主敎)을 믿었다는 이유만으로 전남 강진에서 18년간 귀양살이를 했다. 유배 생활할 때도 나라에 대해 단 한마디도 원망하지 않고 견뎠다. 그 대신 평생을 나라 걱정, 백성 걱정 및 관료들의 부패 척결에 앞장섰다. 정약용은 500여 권의 저술을 통해 국가 운영에 관한 정치, 행정, 법학, 경제, 지리, 의학, 공학 등을 아우르며 철저한 실학사상을 펼쳤던 실사구시의 대표자였다. 조선 시대에는 전국적으로 초시는 1천명, 진사는 200명을 합격시켰는데 다산은 22세에 진사에 합격해 성균관에 입학할 자격을 갖추었다. 진사 합격자들은 왕에게 인사하는 기회가 있었는데 조선 왕조 최고의 대학자였던 정조는 다산의 주관식 논문을 읽고 인재로 키워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처음 만난 날 정조가 정약용에게 물었다. “네 이름이 무어냐?” “예, 정약용입니다.” “나이가 몇이냐?” “22살입니다.” “알았다.” 이 첫 만남을 다산은 풍운지회(風雲之會) 즉 ‘구름과 바람의 만남’이라고 했다. 정조는 성균관 재학생들에게 수시로 시험을 치렀는데 다산이 계속 장원(수석)을 하니 다산을 자주 불러 국가 정책에 대해 물어보았고 다산이 올린 정책 여러 개가 곧바로 국정에 반영되기도 했다. 6년간의 성균관 공부를 마치고 28세에 문과에 합격해 벼슬길에 들어선 첫날 시를 지었는데 공직자로서 공렴(公廉)이란 두 글자를 마음속에 다짐한 것이었다. 이 다짐은 그의 평생 동안 한 번도 흔들린 적이 없었다. 33세에 암행어사로서 경기 북부 4개 고을을 암행 감찰했는데 농촌 백성들의 황폐하고 비참한 생활상과 관료들의 부패에 충격을 받고 이것을 그냥 두고 간다면 나라가 망하겠다 생각해 개혁안을 생각하게 되었다. 정조는 정약용이 30세 되던 해 앞으로 10년 계획으로 수원 화성을 건축하라고 지시했다. 정약용은 도성 건축설계를 하면서 도르래의 원리를 이용해 거중기를 발명했으며 거중기 11대를 투입해 2년 4개월 만에 도성 건축을 완성해 정조를 감탄하게 만들었다. 이렇게 다산의 든든한 후원자였던 정조가 갑자기 서거하고(1800년 6월/재위 24년 3개월) 순조가 즉위한 후 노론세력이 정권을 장악하면서 정약용은 인생 최대의 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신유사옥(辛酉邪獄) 때 천주교 탄압에 연루되어 40세에 유배형을 받았다. 1801년 11월 하순경 나주 율정점(栗亭店)에서 정약전과 정약용 두 형제는 기약 없는 눈물의 생이별을 하게 됐다. 둘째 형인 정약전은 흑산도로, 정약용은 강진으로 각각 유배를 떠났다. 강진에 도착한 다산은 하루 종일 아무것도 먹지 못해 동문 밖 주막에 들러 주모한테 어려운 사정을 얘기했더니 “늙은 양반이 무슨 죄를 지었는가는 모르겠으나 죄가 밉지 사람이 밉겠소. 방이 하나 있는데 먹여주고 재워줄 테니 내 부탁 하나 들어줄래요?” “말씀해보세요.” “당신은 암행어사까지 하신 분이라 배움이 많을 것인데 우리 동네 아이들이 배우고 싶어도 선생님이 없어서 배울 수가 없으니 공부를 가르쳐주겠소?” “다른 건 몰라도 그거라면 하겠소.” 정약용은 흔쾌히 허락하고 골방에서 생각했다. ‘그동안 정치한다고 책도 제대로 못 봤는데 이제는 마음껏 책도 보고 글도 써야 되겠구나. 하늘이 나에게 내린 좋은 기회가 아니겠는가?’ 정약용은 이렇게 생각하면서 ‘위기’를 ‘기회’로 바꿔야겠다고 다짐했다. 천 리 길을 가족과 헤어져 떠나온 사람으로서 비범한 생각이 틀림없는 일이었다. 암행어사 시절 관료들의 부패에 고통받는 백성들의 공고함을 직접 보았고 유배지인 강진 고을에서도 홍안애명(紅雁哀鳴/기러기의 슬픈 울음소리)의 슬픈 현실을 보게 되었다. 정약용은 목민관들의 마음 자세가 이런 상태라면 곧 나라가 망할 것이며 개혁하지 않으면 국가와 사회가 유지될 수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서 목민관(공직자)들이 지켜야 할 지침서(매뉴얼)로 목민심서(牧民心書) 48권 16책, 억울한 백성들이 없도록 하기 위해 형옥에 관한 법정서 흠흠신서(欽欽新書) 30권 10책, 정치 사회 경제 제도를 개혁하고 부국강토를 이루기 위한 경세유표(經世遺表) 필사본 44권 15책을 썼다. 경세유표의 원제목은 방례초본(邦禮草本)이었고 미완성작까지 합해 500여 권의 저술을 남겼다.

김형태 박사

<더드림교회•한남대 14-15대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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