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로 민족의 혼 지키고, 조선의 독립 위해 생을 바치다
헐버트는 유복한 교육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미국 버몬트주의 미들베리대학(Middlebury College)의 학장인 아버지와 다트머스대학(Dartmouth College)의 설립자의 증손녀로 태어난 어머니 사이에서 1863년에 태어났다. 다트머스대학을 졸업한 후 뉴욕의 유니온신학교에서 2년간 공부를 한 그가 조선에 오게 된 것은 아버지의 친구로부터 조선에서 영어를 가르칠 수 있는 교사를 모집한다는 소식을 듣고 지원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그는 1886년에 조선에 와서 왕립학교이면서 최초의 근대식교육기관인 육영공원(정동 소재)에서 5년간 영어를 가르쳤다. 사실 그는 영어만 가르친 것이 아니다. 실제로 조선정부는 육영공원을 만든다고 했지만 어떤 것도 준비된 것이 없었다. 따라서 그가 도착해서 커리큘럼부터 교과서까지 모두 직접 만들었고 운영까지 해야 했다.
이렇게 조선과의 관계를 맺은 그는 이후 조선을 자신의 조국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이 되었다. 그가 조선에 입국했을 때 조선은 무너져가고 있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그는 당시 조선의 최고 통치자인 고종과의 각별한 관계를 맺게 되었다. 어쩌면 두 사람의 관계는 숙명적인 것이었는지 모른다. 고종은 국사의 전권을 책임지고 있지만 속수무책인 자신의 모습에 절망하고 있었고, 제3자의 입장에서 한 나라가 망해가는 것을 보고 있는 헐버트는 조선에 대한 연민의 마음이 고종을 지켜야 한다는 사명으로 나타났을 것이다.
고종은 헐버트를 각별한 마음으로 신뢰했다. 국정을 결정해야 하는 순간, 특별히 외국과의 관계에서나 조선의 상황을 외국에 알리기 위해서 헐버트를 전적으로 신뢰했다. 예를 들어서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었을 때 고종은 그것이 부당할 뿐 아니라 허위조약인 것을 만방에 알리고 싶지만 외교채널이 없는 것은 물론 그 일을 일본이 모르게 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고종은 조선의 억울함과 부당한 일본의 강제에 대해서 세상에 알리기 위해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의에 이상설, 이준, 이위종을 밀사로 파견했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은 이 세 사람이지만 사실은 한 명이 더 있었는데 그것이 헐버트였다. 그는 헤이그에서 조선의 진실을 알리기 위해 막후의 역할을 했다.
또한 1894년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가 살해되었을 때 고종은 절망적인 상태에서 무력감에 빠져 자신을 추스르는 것조차 어려웠다. 밤이면 잠을 이룰 수 없는 두려움이 그를 힘들게 했을 때 고종을 지킨 것도 헐버트였다. 그는 언더우드, 에비슨 선교사와 함께 고종의 침실을 지키는 불침번을 자원했고, 고종은 그들이 지키는 가운데 겨우 잠을 이룰 수 있었다. 쓰러져가는 조선의 최고 통치자의 고뇌를 함께 할 수 있었던 사람들이 선교사들이었다. 특별히 헐버트는 조선의 미래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가 할 수 있는 한 무엇이든지 해야만 한다는 책임을 갖고 조선인으로서 자신의 삶과 역할을 생각했다.
그러한 의지는 그의 삶을 조선의 역사와 함께 만들어가는 것이었다. 그 중에 여기서 그를 살펴보아야 하는 이유도 찾을 수 있다. 그 이유는 YMCA의 출발점에 그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쓰러져가는 조선을 안타까워하는 만큼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는 책임감이 그를 지배하고 있을 때 조선의 미래를 조선의 청년들에게서 찾았다. 그의 눈에 보이는 조선의 청년들은 미래가 없었다. 방치된 상태에서 생존의 의미 이상의 무엇을 소망하지 못하고 있는 청년들이 보였다. 그들을 어떻게 하면 깨우쳐줄 수 있을까를 생각했을 때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이 YMCA였다. 조선의 청년을 깨우칠 수 있는 계몽운동을 전개할 수 있는 방법으로 YMCA의 역할을 기대했던 것이다. 따라서 그는 조선 YMCA의 창립총회에서 의장으로서 산파역할을 했다. 산파역으로만 끝난 것이 아니라 실제로 초대 부회장으로 YMCA의 실무적인 일을 구상하고 그것을 실천으로 옮기는 사업을 주도했다. 청년만이 아니라 조선에 신문화를 소개하는 것과 함께 조선인들의 미래를 만들어가게 하는 역할을 감당했다.
조선에 대한 그의 사랑은 조선을 위해 선택하는 그의 일이나 인생을 보아 짐작할 수 있다. 그만큼 그에게 조선은 그냥 피선교국가의 개념이 아니었다. 그가 무엇인가를 책임져야 하는지, 자신의 나라였다고 할 만큼 그는 조선을 위해서 생각했다. 조선의 문화, 언어, 역사, 문화재, 주권과 조선 사람들까지 그에게 있어서 그냥 지나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조선을 지배하고 있는 일본이 조선의 역사와 문화까지 말살하려는 정책을 펼칠 때 그는 조선의 그 모든 것을 지켜내기 위해서 몸부림을 쳤다.
특별히 그가 몰두했던 것은 한글을 지키고 알리는 일이었다. 한글의 우수성과 편리성을 세상에 알려서 작은 나라지만 언어와 문자를 독자적으로 갖고 있는 조선이 제국주의에 의해서 스러져가는 것을 그냥 두고 볼 수 없었다. 따라서 그는 한글로 책을 만들어서 교과서로 사용했다. 그것이 세계의 지리를 가르치기 위해서 만든 <사민필지>라고 하는 책이었고, 그 외에도 조선의 역사를 쓴 <한국사> <대동기년> <대한제국 멸망사> 등 조선의 역사를 기록으로 남겼다.
을사늑약과 한일병탄으로 이어지면서 본격적인 식민지국가로 만들겠다는 일본의 야욕은 그로 하여금 가만히 있을 수 없게 했다. 그는 미국으로 건너가서 루즈벨트 대통령을 직접 만나서 조선을 위해서 뭔가 할 수 있는 것을 만들어보려고 했다. 하지만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다시 조선에 돌아와서 일본이 부당하게 조선을 침략했음을 온 세상에 알리기 위해서 <한국평론>이라고 하는 글을 썼다.
일제 말기에 강제로 추방을 당할 수밖에 없었던 그가 해방이 되자 가장 기뻐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해방 이후 조선에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1949년 이승만 대통령은 헐버트를 광복절 행사에 초청을 했다. 비록 분단국가로 독립을 했지만 국민에게 주권이 있는 국가로 거듭난 대한민국을 확인하는 순간 벅찼다. 하지만 그가 한국에 돌아와서 대한민국의 독립을 확인하는 것으로 그의 생애도 마감되었다. 그렇게 사랑했던 한국의 품에 안겨 84세의 생애를 마감했던 것이다. 그는 미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지금까지 이 땅에 잠들어 있다.
이종전 박사
인천기독교역사문화연구원 원장
개혁파신학연구소 소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