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단] 국가와 교회 위한 그리스도인의 책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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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우리는 국가와 사회를 향한 그리스도인의 책임에 대해 깊이 성찰해야 할 시점에 서 있다. 1982년 미국 워싱턴의 한 대규모 집회에서는 ‘불신자가 정계, 교육계, 언론계 등 사회 전반을 장악하도록 방치한 죄’를 회개하는 기도가 있었다. 한국 교회 역시 1999년, 과거 신사참배의 과오와 교회의 분열상, 그리고 세속 정치에 대한 무관심을 하나님 앞에 통렬히 고백하며 갱신을 다짐한 바 있다. 이는 교회가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다하지 못했음을 인정하는 아픈 자기반성이었다.

많은 성도가 여전히 정치를 멀리해야 할 영역으로 생각하곤 한다. 고대 철학자 안티스테네스는 정치를 불에 비유하며 “화상을 입지 않기 위해 너무 가까이 가선 안 되고, 동상을 당하지 않기 위해 너무 멀리 가선 안 된다”고 말했다. 지혜로운 균형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국가의 정치가 잘못될 때 성도의 평안한 삶 역시 위협받는다는 점이다.

성경은 국가와 위정자를 위한 기도의 중요성을 명백히 가르친다. 디모데전서 2장 2절은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한 중에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라”고 권면한다. 이는 하나님과의 관계(경건)와 세상 사람들과의 관계(단정) 모두에서 신자다운 삶을 영위하기 위해 국가의 안정이 필수적임을 시사한다.

예레미야 29장 7절의 말씀은 더욱 적극적인 자세를 요구한다. “너희는 내가 사로잡혀 가게 한 그 성읍의 평안하기를 힘쓰고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라 이는 그 성이 평안함으로 너희도 평안할 것임이니라.” 하나님께서는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이스라엘 백성에게 원수의 나라를 위해 기도하라 명하셨다. 이는 모든 역사와 나라의 흥망성쇠가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으며 성도는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평안을 위해 헌신할 책임이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 사회의 모습은 어떠한가? A.E. 스티븐슨의 연설처럼 “민주주의 정부는 그 국민보다 더 현명할 수 없다.” 우리는 선거 때마다 지역 감정이라는 망국적인 병폐를 목격한다. 부도덕하고 파렴치한 정치인이라도 지역 감정에 호소하면 당선되는 현실은 부끄러운 우리의 자화상이다. 민주주의는 결코 국민의 수준을 앞지를 수 없기에, 정치인의 수준은 곧 그들을 선택한 유권자들의 수준을 반영한다.

이러한 정치 현실의 근본적인 원인은 바로 ‘무관심’에 있다. 노벨 평화상 수상자 엘리 위젤은 사랑이나 삶의 반대말은 증오나 죽음이 아니라 ‘무관심’이라고 일갈했다. 사회의 불의와 부조리에 대한 침묵과 무관심은 악에 동조하는 행위가 될 수 있다.

특히 그리스도인에게 무관심은 심각한 직무유기이다. 한국 기독교인 중 판검사, 변호사, 공무원 등 공직에 종사하는 이들이 약 20만 명에 이른다고 한다. 만일 이들이 권력 앞에 바로 서서 하나님의 공의를 대변했다면 우리 사회는 지금보다 훨씬 더 정의로웠을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이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입’이자 ‘파수꾼’으로서의 사명을 받았다.

과거 한국 교회는 ‘정교분리’ 원칙을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현실 정치에 대한 관심을 소홀히 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칼뱅을 비롯한 종교 개혁자들은 결코 현실과 동떨어져 있지 않았다. 그들은 현실 정치에 깊이 관여해 하나님의 말씀이 사회 속에서 구현되도록 최선을 다했다.

오늘의 교회는 이러한 개혁주의 전통을 따라 선지자적 사명을 회복해야 한다. 정치는 더 이상 외면해야 할 영역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실현하기 위해 우리가 적극적으로 기도하고 참여해야 할 헌신의 영역이다. 국가와 교회를 위해 깨어 기도하며 행동하는 파수꾼의 사명을 회복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규 목사

<양평동교회 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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