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신놀이로 대표되던 죽음의 문화, 핼러윈(Halloween) 축제가 결국 우리 사회에서 큰 비극으로 이어졌다. 수많은 생명을 앗아간 그 사건은 단순한 축제가 아니라 시대의 문화가 얼마나 위험하게 변질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이었다.
매년 10월 말이면 유령이나 괴물 분장을 한 젊은이들이 거리를 누비며 사탕과 초콜릿을 얻는 풍경이 낯설지 않다.
그러나 그 속에는 ‘죽음’을 희화화하고, 폭력과 공포를 오락의 형태로 소비하는 왜곡된 문화의 그림자가 자리잡고 있다. 미국에서조차 총기난사와 살인사건으로 얼룩진 이 축제를 굳이 한국 사회에 들여올 필요가 있을까. 이제는 과감히 걷어내야 할 때다.
오늘의 문화는 뉴에이지(New Age) 운동처럼 ‘종교성을 제거하고 인간성을 높인다’는 미명 아래 하나님을 부정하는 방향으로 흐르고 있다. 서울 한복판에서는 동성애를 조장하는 퀴어(Queer) 축제가 버젓이 열리고, 반(反)신적이고 사탄적인 요소들이 거리낌 없이 등장한다. 이런 현상을 방관하는 교회의 무관심은 결국 세상의 타락을 묵인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복음’과 ‘문화’는 교회가 함께 붙잡아야 할 두 축이다. 복음이 교회 안에서의 사명이라면, 문화는 세상을 향한 언어다. 이 둘을 균형 있게 품지 못한다면 교회는 미래를 잃게 된다. 복음의 빛이 문화 속에서 비추어질 때, 세상은 하나님 나라의 아름다움을 보게 된다.
기독교 문화는 단순한 예술 활동이 아니다. 그것은 복음의 풍성함을 일상 속에서 경험하게 하는 통로이다. 문학, 음악, 미술, 영화 등 다양한 표현을 통해 살아 있는 신앙의 이야기가 전해질 때, 사람들은 복음을 새롭게 만난다.
2017년, 윤동주 시인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별이 된 시인 동주’ 전시회와 시낭송, 콘서트를 개최했을 때 일부 교계 인사들은 “교회가 세속문화를 왜 다루느냐”고 비판했다. 그러나 과연 교회가 신학만으로 세상과 소통할 수 있을까? 문화적 대변혁의 시대를 살아가는 크리스천들은 세상을 향해 어떤 언어로, 어떤 방식으로 복음을 전해야 할까?
오늘의 한국 사회는 문화와 문명의 경계를 넘어선 ‘문화전쟁’의 시대에 있다. 그 속에서 기독교가 반(反)문화적 존재로 오해받기도 한다. 그러나 본래 문화의 목적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을 그분의 뜻에 따라 아름답게 다스리는 데 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향으로 세상을 개발하고 다듬는 것이 바로 ‘참된 문화’다.
반대로 인간의 욕망과 이기심으로 피조세계를 변형시키는 문화는 왜곡된 문화이며, 하나님 나라를 향한 길을 가로막는다.
따라서 구속받은 교회와 성도의 사명 가운데 하나는 바로 ‘문화 변혁’이다. 잘못된 문화를 그대로 두지 않고, 하나님의 의도에 맞게 새롭게 바꾸어가는 일이다.
교회는 각 문화 영역에서 신앙의 소명을 따라 전문가들을 세워야 하며, 그들이 사회 속에서 영향력 있는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지지해야 한다. 문화는 전문성과 창의성이 결합될 때 진정한 힘을 발휘한다.
작은 글 한 편, 그림 한 장, 찬양 한 곡, 기독 영화 한 편이 사람들의 삶에 생기를 불어넣고 신앙의 길로 이끈다.
부활절이나 성탄절 같은 절기도 교회 안에 머무르지 않고 세상 속으로 나아가야 한다. 거리와 광장에서, 예술과 미디어 속에서 복음의 생명력을 전해야 한다.
교회는 이러한 문화사역자들을 격려하고, 그들의 활동이 사회 전반에 퍼질 수 있도록 든든한 지지 기반이 되어야 한다. 그것이 교회가 세상을 섬기는 또 하나의 방식이다.
이제 교회는 더 이상 방관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죽음의 문화를 걷어내고 생명의 문화를 세우는 일, 그것이 바로 오늘의 교회가 감당해야 할 시대적 사명이다.
교회가 관심을 가지고 함께할 때, 진정한 문화 변혁이 일어난다. 세상은 여전히 영적 전쟁터이며, 수많은 크리스천들이 그 한복판에서 깨어 싸우고 있다.
그들의 헌신과 눈물 위에 생명의 문화, 하나님 나라의 문화가 피어나야 한다.
이효상 목사
<다산문화예술진흥원 원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