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긴과 보아스] 혹 동상이몽(同牀異夢)은 아닌가?

Google+ LinkedIn Katalk +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과 제자들의 생각이 동상이몽(同牀異夢)으로 표현되고 있는 곳이 많이 있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한 공간에 있었지만, 관심사가 정반대였습니다. 제자들은 높아짐을 생각했고 예수님은 낮아짐을 생각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생각하고, 낮아지고 또 낮아지는 길을 걸으셨습니다. 사람으로 이 땅에 오셨고, 마침내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세상은 높은 사람을 최선을 다해 영접하는 것을 영광으로 여기지만, 하나님은 가장 작고 낮은 사람을 영접하는 것을 최고의 영광으로 여기십니다(막 9:37). 만일 우리의 눈과 관심이 높은 사람만을 향한다면 하나님의 뜻을 어기는 것입니다. 높은 자리에 올라 선한 영향력을 널리 끼치기 원한다는 말로 자신의 야망을 포장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런 면에서 오히려 예수님의 제자들은 솔직했고, 우리는 그것을 숨길 뿐입니다. 

높은 자리는 우리가 낮아질 때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입니다. 세상에서 영광과 칭찬을 받으면 하나님 나라에서는 상을 잃어버립니다(마 6:5). 하나님의 나라는 서로 큰 자가 되려고 다투는 곳이 아니라, 약한 자가 주님과 같이 영접 받는 곳입니다. 제자들의 꿈이 예수님의 꿈과 일치되어야, 땅에서도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교회는 세상의 원리와 정반대의 원리로 존재해야 합니다. 섬기는 자, 영접하는 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원래 이 세상 풍조와 사탄을 따라 살며 육체의 욕심을 좇는,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습니다(엡 2:3). 하나님은 우리를 죄와 사망의 고통스러운 자리에서 의와 생명의 영광스러운 자리로 옮겨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의 꿈이 예수님이 바라시는 낮아짐으로 조정되어야 비로소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다운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종교 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주기도문을 가리켜 ‘최대의 순교자’라고 했습니다. 왜 이런 말을 했을까요? 주기도문에 순종할 의사도 없이 그저 암송만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기도가 진정한 능력이 되려면 반드시 배워야 할 것이 순종입니다. 그래서 앤드류 머레이는 “예수님을 믿을 때 우리는 순종의 학교에 입학한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 말씀에 대한 순종은 이 세상에서 가장 큰 복이며, 순종은 우리를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1947년 스위스 개혁 신학자 칼 바르트에 의해 유명해진 문구로 아우구스티누스의 말에서 유래했다고 알려진 “개혁된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 Ecclesia reformata semper reformanda)”는 말처럼 우리는 끊임없이 자신을 되돌아 보아 말씀 앞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의 고난으로 나의 영광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나의 고난으로 하나님의 영광이 되는 삶이 될 것입니다. 

이제 한국교회와 성도들이 예수님과 동상이몽(同牀異夢)이 아니라 같은 말, 같은 마음, 같은 뜻(고전 1:10)으로 주님을 닮아가기를 소망합니다. 

김승민 목사

<총회 서기, 원미동교회>

공유하기

Comments are clos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