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랫동안 존속해 온 전옥서도 청일전쟁 후 조선이 독립하기에 이른 무렵에 개축되어 완전히 옛 모습조차 존재하지 않기에 이르렀으나 개축 직전 전옥서 설비의 모양이 당시 이곳의 서리(書吏)로 근무하고 있었던 김태석(金泰錫)에 대해 들을 수 있었다.
즉 구내에 다시 둥근 담장을 설치했고 그 내부에는 옥사만을 두었으며, 청사 등과 같은 건물은 모두 둥근 담장 밖에 설치되어 있었다고 하는 것은 확실한 것 같다. 그리고 당해 그림에 남옥만이 그려져 있고 여옥(女獄)의 위치를 표시하고 있지 아니한 것은 약도(略圖)이기 때문에 그리면서 빠뜨려진 것에 연유한 것으로, 남녀 양옥(兩獄)이 설치되어 있었던 것은 틀림없던 것 같다. 또 옥사에는 겨울 거처와 여름 거처의 설비를 두었고, 또한 바깥쪽 담과 안쪽 둥근 담과 이중 담장(圍障)으로 하고, 또한 여러 개의 출입문(墻門)을 설치해 수용구역을 엄중하게 분계 폐쇄했으며 옥사에 가까이 압뢰(押牢)숙직소의 설비를 두었다. 감방은 대혼거식이었다. 그리고 각 방에는 육전조례에 따라 빙지목(憑支木)을 설치하고, 바닥에는 판자를 깔았다. 또 판자문을 설치하고 큰 자물쇠를 채우고, 판자문에는 물과 불, 음식, 더위에 숲의 공기가 통과하도록 하기 위해 판자벽에 구멍(穴)을 내어 두는 것으로 되어 있다. 옥사의 구조를 이와 같이 되어 있는 것은 오랫동안 몇 차례의 변천을 거쳐 점차 여기에 이른 것으로 논의가 필요하지 아니하다.
금부옥은 의금부 구내에 병설되어 있었다. 의금부는 후년의 상소재판소가 된 평리원(平理院) 건물로 오늘날 종로경찰서의 위치가 그 부지였다.
즉 옥사로는 남간(南間)과 서간(西間)이 2동을 설치하고 외부로부터 접근을 금지하기 위해 각 간의 전면에는 돌로 쌓은 담을 만들고 그 내부를 정원으로 했다. 또 옥사는 온돌식으로 사방의 안쪽은 판자벽, 외측은 흙벽으로 하고 전면에만 높은 창을 붙이고, 출입구에는 출입문을 설치했다. 그리고 남, 서의 양 감방의 용적은 확실하지 아니한 것은 물론 매우 비좁았던 것이었음에 틀림없다.
김성기 목사 <세계로교회>
한국교도소선교협의회 대표회장
법무부 사)새희망교화센터 이사장
대한민국새희망운동본부 대표회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