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이슈] 한국교회 순교자들 (4) 정일선 목사 ⑤

Google+ LinkedIn Katalk +

산정현교회의 설립과 부흥, 그리고 신사참배 저항

6월에 평양 성내 융흥면 삼리 계동 서쪽에 있는 산정현(山亭峴)에 56평 규모로 1천여 원의 공사비를 들여 예배당을 신축하고 교회명을 산정현교회(山亭峴敎會)라고 명명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다음 해 1월 19일 영수 계택선과 조사 한승곤을 장로로 장립하고 당회를 조직해 조직교회로 성장하게 되었다. 조사 겸 영수는 변흥삼, 김동원, 김상은이었다.

1909년 남녀 권찰을 세워 각 구역을 맡기고 매월 초에 모임을 보고케 하니 이는 권찰회의 시작이었다. 김상은 영수가 별세했다. 다음 해에 영수 김동원을 장로로 장립했다. 1911년 한승곤 조사의 병으로 계택선이 조사 직무를 했다.

1912년 105인 사건으로 김동원 장로를 경성 총감부에서 체포해 온갖 악형을 가한 후 감옥에 가두었다. 장로 계택선이 평양신학교를 1912년에 제5회로 졸업한 후 장천교회 담임으로 부임했다. 1913년 1월 5일 본 교회의 장로이며 조사였던 한승곤이 목사 안수를 받은 후 편하설 목사의 뒤를 이어 제2대 담임목사로 취임했다.

1914년 붕리 교우 박유성이 전일일 반경(田一日 半耕; 밭 하루 반 갈이)을 기부했고, 중리학교가 크게 발전했으며, 편하설 선교사가 안식차 귀국했다. 1915년 한승곤 목사가 사임하고 도미함으로 3월 16일 평양신학교 1910년 제4회 출신인 안봉주(安鳳周) 목사가 부임해 영수 변흥삼을 장로로 장립했다. 이후로 영수제도를 폐지했다. 미국 교인의 2천 원 기부로 교회 대지를 매입했다.

1917년 6월 17일에 평양신학교 제10회 졸업생인 강규찬 목사가 안봉주 목사 후임으로 부임했고, 24일에 위임식을 거행해 15년간 담임목사로 시무했다. 시무 당시 교회가 부흥해 예배당을 증축하고 개인의 영성과 신앙 발전에 혼신을 바쳤다. 

그뿐 아니라 신앙 안에서 민족적 독립을 고취 실천하는 데도 앞장섰다. 강규찬 목사는 3·1 독립운동 당시 본 교회 김동원 장로와 함께 평양에서 만세시위를 주동한 인물 중의 한 사람이며, 3월 1일 평양 숭덕학교 교정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함으로 체포되어 2년간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계속 본 교회에서 담임목사로 1932년까지 시무하다가 은퇴했다.

1922년 12월 31일 조만식 집사를 장로로 장립했다. 김동완, 조만식 장로를 중심으로 평양 YMCA 조직, 평양 일곱 교회 연합으로 숭인, 숭덕, 숭현학교를 운영했다. 1936년 주기철 목사를 담임목사로 청빙했다.

이후 조선예수교장로회는 제27회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결의했다. 이에 신사참배를 반대하며 일사각오로 신앙정절을 지키고자 한 주기철 목사는 일제에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을 받았고, 산정현교회에도 폭풍이 몰아쳤다. 평양노회 전권위원회가 예배를 주도하려고 경찰의 호위 속에 최지화, 정운경, 이인식 장로 3인이 입장했으나 성도들은 끝까지 “내 주는 강한 성이요”를 찬송하며 저항했다. 당일 오후 경찰을 대동한 일제의 주구 장운경이 산정현교회의 집회를 정지하는 평양노회 전권위원장 명의의 경고장을 붙였다. 그리고 주기철 목사 가족을 사택에서 쫓아냈다.

이승하 목사

<해방교회 원로>

공유하기

Comments are clos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