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기철 목사는 신사참배를 철저히 배격하다가 4월 21일 순교했다. 4월 25일 평양 서광중학교 앞 공터에서 장례식이 거행되었고, 평양 돌박산 공원묘지에 안장되었다.
해방 후 평양 산정현교회는 교회 회복과 함께 출옥한 이기선 목사, 한상동 목사, 방계성 목사, 안도명 조사, 명신홍 조사가 시무했다. 한국 기독교 혁신복구를 위한 임시노회가 열렸고, 20일에는 동 교회에서 한국교회 재건의 기본원칙을 도출해내서 설득 작업에 나섰다. 이때 이기선 목사와 한상동 목사가 본 평양 산정현교회 당회장직을 거치면서 혁신복구 화해를 위한 대표적 역할을 했다.
신사참배를 결사반대하다가 폐쇄되었던 산정현교회는 해방과 함께 교회의 문이 활짝 열리고 흩어졌던 교인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동년 8월 17일에는 한국 기독교를 대표해 우상숭배인 신사참배를 결사반대하다가 평양 감옥에 투옥되었던 25명 중 옥중 순교한 9명 외에 16명이 출옥했다[이들은 자신들을 진리를 지키려고 노력했던 자들이라고 하면서 ‘산 순교자’라는 명칭을 겸손히 거절하고 수진자(守眞者)로 자처했다]. 그들은 신사참배에 항거하다가 폐쇄되었던 산정현교회로 찾아와 그곳에서 2개월간 숙식을 같이하면서 순수한 신앙의 고귀한 모습으로 기도 속에 한국 기독교의 혁신 복구방안을 마련했는데 그 정신은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이다”라는 회개 속의 일치였다.
주기철 목사가 순교한 후에 김철훈 목사가 담임목사로 부임했다. 그 과정에서 교회가 분열되었다. 그리하여 김철훈 목사는 교회를 화평하게 하려고 기도를 많이 하면서 장로들과 합심해 산정현교회를 본래의 모습으로 회복했다.
그러나 1945년 해방이 된 후 북한에서는 소련의 영향으로 김일성이 공산정권을 이루려고 작정했고, 이에 반대하는 기독교를 박해하기 시작했다. 1946년 11월 3일, 인민위원회 의원을 선출하는 선거를 실행하려고 했다. 그날은 주일이었다. ‘북한 5도 연합노회’가 적극 저지하려고 나섰으나 이미 작정된 정책이었다. 기독교인들을 회유하고 억압함으로 결국 선거는 주일에 실행되었다.
평양신학교 출신인 김일성의 외삼촌 강양욱 목사를 중심으로 한 ‘기독교도 연맹’은 기존의 교회 지도자들을 박해하고 체포, 감금, 고문, 그리고 처형했다. 1946년 5월 조만식 장로가 평양에서 소련 군정을 반대하다가 감금된 후 행방불명되었다. 결국 김철훈 목사도 주기철 목사처럼 공산당에게 순교했다.
이제 정일선 목사가 주기철 목사, 김철훈 목사가 순교한 산정현교회에 청빙을 받고 떠나려고 할 때 재령 동부교회 교인들은 눈물로 그 길을 가로막았다.
그러나 정일선 목사는 “사탄에게 굴복하면 지옥 갈 것이니 진리를 사수하라” 하고 외치며 기독교도 연맹에 가입하지 말 것을 당부하고 “이 나라가 하나님 공경하면 살고, 대적하면 나라도 개인도 망할 것이다”라고 강조했다.
이승하 목사
<해방교회 원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