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둔의 나라에 울린 첫 변화의 종소리
곤당골에서 시작된 신분평등의 복음
승동교회 ① (서울중앙교회)
승동교회의 역사는 특별한 것이 많다. 그 시작이 그랬고, 조선사회의 변화와 한국장로교회의 분열에 이르기까지 복음이 조선에 전해지면서 필연적으로 동반되는 것들을 직접 경험하면서 극복해야 하는 것들이 있었다. 그러한 과정을 통해서 오늘의 사회와 문화가 형성되었고, 그것을 이어주는 역할을 한 교회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장로교회사에서만이 아니라 한국 교회사에서 특별한 의미를 갖고 있는 것들을 이 교회에서 찾아볼 수 있 있다. 은둔의 나라 조선에 전해진 복음이 단지 한 개인의 신앙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사회의 변화를 동반하면서 많은 변혁과 새로운 문화를 받아들여서 새로운 사회적 가치와 문화를 형성시켰기 때문이다.
특별히 그 중심에 승동교회가 있다. 승동교회가 형성되고 성장하는 과정에서 유교가 지배하던 조선에 들어오면서 세계관의 다름 때문에 교회 안에서 겪게 되는 다양한 충돌과 변화는 아픔을 동반했다. 하지만 그 아픔은 필연적으로 한국사회의 변화를 낳았다. 그러한 과정을 통해서 오늘 우리 사회가 있는 것도 부정할 수 없다.
북장로교회의 무어(S. F. Moore, 모삼열) 선교사는 아직 조선말이 서툰 상태에서 1892년 9월부터 부인과 함께 서울 장안에 전도를 나섰다. 그가 장안에서 자리를 잡은 곳은 곤당골이었다. 1893년 봄 곤당골(을지로 1가 롯데호텔 부근)에 한옥을 구입해서 16명이 예배를 드리기 시작한 것이 현 승동교회의 효시다. 그는 곤당골에서 학교도 시작했고, 주변의 구리개(을지로 2가 외환은행 본점)에 있던 제중원에도 찾아가서 전도했다. 치료를 받을 수 없었던 당시의 시대적 상황은 선교에 크게 도움이 되었다. 즉 제중원에서 치료를 받은 환자들이 곤당골교회에 출석하게 됨으로 교회가 크게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이 같은 사실을 보여준다. 그러한 의미에서 곤당골교회는 선교병원과 함께 성장한 교회라고 할 수 있다.
또한 곤당골교회가 갖고 있는 많은 이야기가 있다. 그 가운데서도 유교가 지배했던 조선시대 계급사회에 기독교가 들어오면서 사회적 변화를 겪게 되는 과정에서 극복해야만 했던 아픔은 이제는 지나간 이야기지만 이 교회의 역사에서 반드시 기억되어야 할 일이다.

곤당골교회 초기에 있었던 일이다. 어느 날 교회에 엄청난 소란이 일어났다. 그것은 관잣골(貫子洞, 종로2가 관철동 일대) 백정마을에 살던 박성춘이라는 사람 때문이었다. 그는 백정으로 차별을 받고 사는 것이 한이 되어 아들만큼은 가르쳐서 사람답게 살게 하고 싶었다. 하지만 신분제도가 있었던 당시에 천민이, 그것도 가장 낮은 백정이라는 신분을 가진 사람의 자녀가 가르침을 받을 수 있는 길은 전혀 없었다. 그런데 마침 곤당골교회에서 운영하는 예수교학당에서 공짜로 가르쳐준다는 소문을 듣게 된 박성춘은 아들을 교회에 보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그는 자신의 아들을 곤당골교회를 통해서 가르침의 기회를 만들었다. 그의 아들은 후에 이름을 박서양으로 바꾸었고 1908년 세브란스의학교 1회로 졸업을 하고 의사가 되었으니, 그의 소망을 이룬 셈이다.
그런데 박성춘 자신이 전염병에 걸려서 사경을 헤매게 되었다. 무어 선교사가 그 소식을 듣고 당시 제중원을 맡아서 일하고 있던 에비슨(Oliver R. Avison, 1860~1956) 선교사를 데리고 백정마을인 관잣골을 찾아가서 치료를 했는데 다행히 그가 건강을 찾을 수 있었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박성춘은 곤당골교회에 출석하게 되었다. 그러나 문제는 전혀 의외의 것에서 시작되었다. 즉 그가 곤당골교회에 출석하면서 교회에서는 천민 신분인 백정이 같은 공간에서 예배를 드리는 것이 문제가 되었던 것이다. 신분에 대한 차별이 엄격했던 당시에 백정이 교회에 나오는 것에 대해서 양반들이 백정과 함께 예배를 드릴 수 없으니 다른 교회로 보내라고 무어 선교사에게 요구하면서 문제의 발단이 된 것이다. 하지만 무어는 하나님 앞에서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고 하면서 양반들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다. 무어의 강력한 입장에 대해서 양반들이 제시한 타협안은 백정을 다른 교회로 보낼 수 없다면 예배당 뒤쪽에 별도의 자리를 마련해서 따로 앉도록 해달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무어는 그것도 허락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결국 1895년 곤당골교회의 양반신분 신자들이 중심이 돼서 홍문섯골(紅門洞, 삼각동 조흥은행 본점)에 예배당을 마련하고 떨어져나갔다.
이 일로 입장이 난처해진 것은 박성춘이었다. 그는 오기로 전도를 열심히 했다. 특별히 백정마을을 찾아가서 백정을 사람으로 인정해주는 사람들과 종교가 있으니 오라고 했다. 서울만이 아니라 근교 지방에도 찾아가서 백정들에게 전도를 했다. 곤당골교회는 그의 전도로 인해서 천민들 중심의 교회가 되었다. 이로 인해 곤당골교회에 대한 소문은 나빠질 수밖에 없었다. 세인들은 곤당골교회를 일컬어 첩장(妾丈)교회, 즉 첩살이하는 계집과 백정놈들이 다니는 교회라고 비하했다. 그러나 곤당골교회는 서울 장안에서 백정들과 천민들에게 인간의 평등을 체험하고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곳이었다.
이종전 박사
인천기독교역사문화연구원 원장
개혁파신학연구소 소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