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은 신앙의 자리] “신분 해방의 물결과 승동교회의 새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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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정해방 칙령과 다시 시작된 신분 갈등, 그리고 교회의 새로운 정체성

승동교회 ② (서울중앙교회)

당시 사회적으로 가장 천한 신분이었던 백정, 그들은 백정 이상일 수 없었다. 그럼에도 그들의 신분에 대한 관심을 가진 사람들은 없었다. 

지극히 당연하다고 여겼던 것이 조선시대의 신분의식이고 분위기였다. 그러한 백정의 신분을 같은 인간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여준다는 것은 다른 세계를 경험하는 것과 같았을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박성춘에게 백정의 해방이 곧 복음으로 받아들여졌을지 모른다.

어떻든 이를 계기로 박성춘은 백정해방운동에 나섰다. 무어와 에비슨 선교사의 지원을 받아서 백정차별을 철폐할 것을 탄원하는 서안을 작성해서 조정에 보냈다. 갑오개혁(1894) 이후 신분 차별에 대한 규정이 없어졌지만 사회적 인식은 바뀌지 않았으며 여전히 신분차별이 일반적이었다. 특별히 백정에 대한 인식은 바뀌지 않았다. 따라서 백정해방과 함께 상징적인 조치를 요구했다. 즉 조선시대의 신분을 나타냈던 의관을 폐지해서 백정도 갓을 쓸 수 있게 하고, 도포도 입을 수 있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이듬해인 1895년 4월 백정들의 요구를 시행한다는 정부의 칙령이 내려졌다. 이를 계기로 칙령이 발표된 날 백정들이 갓을 쓰고 도포를 입고 하루 종일 팔자걸음으로 종로거리를 왔다갔다했다고 한다. 박성춘은 감격에 겨워 갓을 쓰고 잠을 잤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세상이 바뀌자 홍문섯골교회로 분리해서 나갔던 양반들이 3년만인 1898년에 다시 홍문섯골에서 백정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하지만 홍문섯골교회의 평화는 오래가지 못했다. 일부 양반들이 이권문제로 선교사들에게 지원을 요청했으나 선교사들이 그것을 거부하자 교인들을 선동해서 무어와 에비슨 등 선교사들이 교회에 들어오는 것을 막았다. 

결국 선교사들을 쫓아낸 것이다. 선교사들은 자신들을 따르는 신자들을 데리고 제중원에서 예배를 드려야 했다. 그러나 제중원에서 모임을 갔던 교회도 얼마 후 흩어지고 말았다. 

북장로교회 선교부는 조선정부가 덕수궁을 확장하려는 계획을 수용해서 정동의 선교부를 폐쇄하고 남대문 밖(桃洞)과 동대문 안 연못골(연지동) 두 곳으로 선교부 거점을 새롭게 마련했다. 에비슨 선교사가 중심이 돼서 1904년 제중원을 남대문 밖으로 옮겨 짓고 세브란스병원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이때 제중원에서 예배를 드리던 신자들 대부분은 세브란스병원으로 옮겨 예배를 드렸고, 이 교회는 후에 남대문교회가 되었다. 

한편 박성춘을 비롯한 곤당골교회의 신자들은 곤당골예배당을 매각하고 미국의 컨버즈(J. H. Converse)가 보내준 헌금으로 종로에 절골(寺洞, 인사동 137)에 한옥을 구입해서 예배당으로 수리를 해서 1905년 8월 1일부터 예배를 드렸다. 이것이 현재의 승동교회가 이곳에서 곤당골 공동체의 역사를 잇게 된 것이다.

승동이라는 명칭은 이곳이 본래 원각사라는 큰 절이 있어서 절골이라고 불렸는데, 동시에 승려가 많아서 승동(僧洞)이라고도 했다. 그런데 이 지역에 살던 양반들이 유교적 의식을 갖고 있는 터라 僧(중승)이라는 글자를 싫어해서 承(이을 승)洞이라고 부르기를 원했었다고 한다. 그런데 1907년 부흥회를 인도하러 왔던 길선주 목사의 조언으로 승동교회의 한문표기를 勝(이길 승)洞으로 바꾸어 사용하게 되었다. 

예배당을 이곳으로 옮긴 후 승동교회는 성장을 거듭했다. 이곳에서 승동교회는 천민이 중심이 되어서 성장했지만 양반교인들과 천민교인들 사이에 긴장관계는 해소되지 않았다. 그중에도 다시 박성춘이 문제의 중심에 있었다. 

그가 중심이 돼서 이 교회를 이끌어 왔는데 그를 장로로 세울 것인가 하는 문제가 갈등의 근원이 되었다. 결국 양반신자들이 더 이상 백정이 장로가 되는 교회에서 함께 신앙생활을 할 수 없다고 하면서 1908년부터 재동에서 따로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같은 시기에 주변에 있던 연동교회에서도 비슷한 문제가 발생했다. 즉 연동교회에서 장로를 피택하는 과정에서 양반은 떨어졌고 천민이 장로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 연동교회에 출석하고 있던 양반들이 교회를 이탈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때마침 승동교회를 이탈해서 재동에서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이 양반들인지라 연동교회를 이탈한 이들이 재동에 함께 모이게 되었다. 

따라서 재동공동체의 수가 적지 않게 모이게 되었고, 선교사들은 그 공동체를 몰라라 할 수 없게 되었다. 내용적으로는 특별한 사람들, 즉 양반이라는 신분을 가진 사람들만의 교회를 인정해야 하는 상황에 처한 것이다. 결국 선교사들은 재동공동체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고, 그들이 형성한 교회가 북촌의 안동교회가 되었다.

후에 안동교회를 답사하겠지만 안동교회는 신분의 평등을 인정할 수 없었던 양반들만이 모여서 형성한 소위 양반교회인 셈이다. 결국 선교사들은 이 공동체를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됨으로 1909년 안동교회로의 설립을 하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이번에는 백정과 천민이 중심인 승동교회에서 이탈하지 않고 있었던 초대장로 이여한과 황기연을 중심으로 일부 양반들이 안동교회로 다시 이탈해 옮기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렇게 해서 승동교회는 양반들이 모두 떠나게 되었고, 천민들과 신분의 평등을 지지하는 일부 양반들이 남아서 명맥을 잇게 되었다. 

그러한 의미에서 1909년 이후 승동교회는 천민이 중심인 교회가 된 셈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 있었던 박성춘은 다시 3년이나 지난 후 1911년 12월에 승동교회의 장로가 되었으니, 천민 중에서도 백정이 장로가 되는 역사를 만들었다. 비로소 승동교회가 복음을 통한 신분의 평등을 구현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종전 박사

 인천기독교역사문화연구원 원장 

 개혁파신학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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