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은 사람을 나누기보다 하나되게 하셨다. 그러나 오늘의 사회는 점점 더 많은 문제를 편으로 나누어 판단하고, 속도와 진영의 논리로 복잡한 현실을 단순화하고 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교회는 다시 복음적 기준이 무엇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요즘 사회는 모든 사안을 쉽게 편으로 나눈다. 복잡한 문제일수록 단순한 구도가 선호되고, 중간의 고민은 우유부단으로 취급된다. 어느 쪽에 서 있는지가 곧 입장이 되고, 입장은 곧 사람을 규정하는 기준이 된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대화는 설득보다 공격에 가까워지고, 사회는 점점 더 날카로워진다.
편 가르기는 판단을 빠르게 해 주지만 책임을 가볍게 만든다. 진영 안에 서는 순간 개인의 숙고는 사라지고, 판단은 집단에 위임된다. 옳고 그름을 깊이 따지기보다 우리 편이냐 아니냐가 먼저 작동하면서 문제의 본질은 흐려지고 갈등은 반복된다. 이러한 진영 논리는 사회에만 머물지 않는다. 교회 안에서도 같은 방식의 갈라짐이 나타날 때가 있다. 신앙의 문제마저 편의 논리로 나뉘고, 서로 다른 의견은 곧바로 신앙의 잣대로 재단된다. 그러나 교회의 기준은 어느 편에 서 있느냐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가에 있다. 교회는 진영으로 묶이는 공동체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됨을 향해 부름받은 공동체다.
이 과정에서 반복되는 또 하나의 문제는 같은 기준을 서로 다르게 적용하는 태도다. 자신에게는 관대하고 타인에게는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는 모습은 공동체의 신뢰를 무너뜨린다. 원칙을 말하면서도 스스로는 예외로 두고, 책임은 남에게 미루는 태도는 갈등을 더욱 깊게 만든다.
원칙과 관용은 함께 붙들어야 할 가치다. 원칙 없는 관용은 기준을 허물고, 관용 없는 원칙은 관계를 파괴한다. 어느 하나만 앞세우는 태도는 또 다른 분열을 낳을 뿐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진리와 사랑을 분리하지 않으셨고, 책임과 용서를 함께 요구하셨다.
신앙은 이 지점에서 다른 질문을 던진다. 어느 편에 설 것인가가 아니라 같은 기준을 자신에게 먼저 적용하고 있는가를 묻는다. 신앙은 진영을 강화하는 도구가 아니라 판단의 속도를 늦추고 책임의 무게를 스스로에게 돌리게 하는 기준이어야 한다. 편 가르기가 일상이 된 사회일수록 교회는 더욱 불편한 자리에 서게 된다. 어느 편에도 쉽게 안착하지 못한 채 예수 그리스도의 기준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고 하나됨을 선택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 길은 박수를 받기 어렵고 오해를 감수해야 하는 길이지만, 교회는 늘 이런 자리에서 존재 이유를 증명해 왔다.
지금 필요한 것은 더 큰 목소리나 더 날 선 주장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됨을 향해 살아가려는 분명한 태도다. 그 기준이 회복될 때, 교회는 갈라진 시대 속에서도 여전히 신뢰받는 공동체로 설 수 있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