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노래보다 한 생명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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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로이트 오페라 극장에서 배운 신앙의 선택

 

24년 전, 한국에서는 월드컵의 열기가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 함성에서 조금 떨어진 독일 중부 바이에른 지방의 작은 도시 바이로이트로 향하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인구 8만의 이 도시는, 잘츠부르크 여름음악제와 더불어 세계 오페라 애호가들의 성지로 불리는 ‘바이로이트 여름오페라축제’가 열리는 리하르트 바그너 오페라 극장이 있는 곳이다.
나는 1998년 이 극장에서 실시한 오디션에 합격한 뒤, 4년 후 전속 합창단원으로 발탁됐다. 한국인 최초로 테너 파트에 초청된 것이었다. 당시 이 소식은 국내 주요 신문 기사와 TV를 통해 보도되었고, 유럽 무대에 데뷔한 성악가로서 큰 영광의 순간이었다.
바이로이트 오페라 축전극장은 악극의 창시자 리하르트 바그너가 1876년 개인극장으로 건립한 곳이다. 매년 7월이면 전 세계에서 수만 명의 ‘바그네리안’들이 이 작은 도시로 몰려든다. 입장권은 13년 전 이미 매진됐을 정도로 귀하며, 매니아들에게는 평생 한 번 이 극장을 찾는 것만 해도 자랑할 만한 곳이다.
당시 나는 경북과학대학교 실용음악과 교수로 재직 중이었고, 이 극장에서 한 달간 바그너의 작품 5편, 총 28회의 공연에 참여했다. 그중에서도 오페라 로엔그린 공연 중에 있었던 일화를 소개하고자 한다.
그해 여름은 유난히 무더웠다. 바이로이트 극장은 에어컨을 가동하지 않았고 관객들은 7시간에 가까운 공연을 인내로 견뎌야 했다. 무대 위의 출연자들 역시 극한의 환경 속에서 노래해야 했는데, 중세 시대의 장군과 병사 복장을 재현한 두꺼운 겨울 털갑옷을 입고 분장한 채로 공연 1막이 시작됐다. 136명의 합창단원은 주역 가수들과 함께 높은 망루 위에서 웅장한 합창을 이어갔다. 세계에서 유명한 가수들과 함께 공연하는 그 자체는 영광이었으나, 의상 안쪽으로는 굵은 땀이 폭포처럼 흘러내렸다.
문제는 무대 뒤에서 벌어졌다. 1막 도중, 함께 입단한 독일 테너 단원 쇼스터만이 더위를 이기지 못하고 무대 뒤에서 쓰러진 것이다. 그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의식을 잃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음악은 멈추지 않았고, 다른 단원들은 2막을 준비하기 위해 각자의 위치로 이동하고 있었다.
그 순간, 나는 선택의 기로에 섰다. 무대로 복귀해야 할 시간, 그러나 눈앞에는 생명의 위기가 있었다. 나는 그를 눕히고 즉시 심폐소생술을 시행했다. 급히 극장 화장실로 달려가 물수건을 가져와 가슴을 젖히고 닦아주고 그를 소생케 했다. 다행히 그는 의식을 회복했지만, 더 이상 노래를 이어갈 수는 없었다. 그를 끝까지 돌본 뒤, 나는 무대 뒤편을 통해 조심스럽게 다시 중앙 무대로 복귀했다. 오페라 합창단 지휘자가 그런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공연이 끝난 밤, 자전거를 타고 숙소로 돌아오며 둥근 보름달을 바라보았다. 고향 생각도 나고, 밀라노에서 5년간 성악을 공부하던 시절, 그리고 다시 독일 무대에서 바그너 오페라를 노래하고 있는 지금의 나를 떠올리며 말할 수 없는 감격에 잠겼다.
그러나 다음 날, 탄호이저 공연을 앞둔 리허설 도중 지휘자는 날카롭게 물었다. “테너 유는 어제 왜 무대에 늦게 돌아왔습니까?” 서툰 독일어로 쇼스터만의 상황을 설명하자, 돌아온 대답은 뜻밖이었다. “당신의 위치가 더 중요해!”
그해 공연 시즌이 끝난 뒤, 나는 다시 초청받지 못했다. 나는 극장장이자 바그너의 손자인 볼프강 바그너에게 편지를 썼다. 로엔그린 공연 중 있었던 일을 사실 그대로 전하며, 왜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자세히 설명했다.
극장장은 그 편지를 읽고 이런 답장을 보내주었다. “테너 유 씨는 이 극장의 영웅입니다.” 그는 이 극장에서는 예측할 수 없는 사고가 종종 발생한다고 덧붙였다. 실제로 그해 함께 공연했던 오페라 마이스터징어의 프리츠 코트너 역 주역 가수 알렉산더 마르코는 30세의 나이로 공연 도중 심장마비로 무대 위에서 생을 마감했다.
나는 다시 초청을 받지 못했지만, 하나님께 감사했다. 노래보다 생명이 우선이라는 믿음의 선택 앞에서, 그 순간 나는 계산하지 않았다. 선한 사마리아인이라 부르기엔 부족할지 모르지만, 절박한 위기 앞에서 한 생명을 외면하지 않았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했다. 몇 해 뒤, 나는 다시 그 극장 무대에 설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도 확신한다. 노래는 멈출 수 있어도, 생명은 멈춰서는 안 된다는 것을.
노래보다 한 생명. 그날 바이로이트에서, 나는 음악보다 깊은 신앙의 화음을 배웠다.

유영재 장로

<영주제일교회, 현 대신대 특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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