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살 손위의 형 정약종과 다산 정약용, 두 형제는 1801년 신유박해의 위협에 직면해 극명하게 서로 다른 길을 선택했다. 정약종은 신앙을 지키고 순교했고, 정약용은 배교해 목숨은 건졌지만 사회적 생명을 잃고 평생 은둔의 삶을 살았다. 200여 년이 지난 지금, 그들의 선택의 의미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본다. 1800년 개혁군주 정조가 급서하자, 득세한 노론 일파가 반대파 남인들을 제거하기 위해 가장 먼저 천주교탄압을 시도했다. 당시 정약용을 비롯한 남인들은 천주교와 서양문물을 도입하는 데 적극적이었고, 정조도 이들과 함께 개혁을 추진했으며, 천주교에 대해서도 유화적이었다. 그런 정조가 사망하자, 노론 일파는 정조의 총애를 받아 승승장구하던 정약용과 남인들을 겨냥해 신유박해를 일으켰던 것이다. 이때는 이미 이 벽, 이승훈, 권일신, 정약용 형제들의 활동으로 만 명의 신도에 이를 만큼 전국적으로 천주교 교세가 확장되고 있었다. 만약 정조가 살아있었다면 역사는 아마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까.
신유박해에 가장 당당하게 맞선 인물은 단연 정약종이었다. 그는 우리나라 최초의 교리서인 『주교요지』를 쓸 만큼, 기독교에 대해 깊고 정확한 이해와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으며 당국의 온갖 위협에도 전혀 굴하지 않았다. 그는 ‘천주교가 진실한 도라고 믿기 때문에, 나라가 금한 후에도 마음을 바꿀 생각이 전혀 없고 죽더라도 조금도 후회하지 않는다’라고 진술하고 의연히 순교했다.
정약용도 1784년 처음 천주교를 접하고 형 정약종에게 전도할 만큼 심취했지만 1791년에 일어난 제사 거부 사건 이후로 천주교 활동에서 떠났음이 확실하다. 그랬기 때문에 신유박해 때 온갖 방법으로 정약용이 연루된 증거를 찾았지만 실패하고, 단지 한때 천주교에 몸담았다는 이유만으로 유배형에 처했을 뿐이었다.
정약종처럼 그도 강직하고 올곧은 성품이었으므로 목숨이 아까워 구차하게 배교한 것이 아니었다. 애초에 그가 천주교를 받아들인 것은 천주교의 하나님이 고대유교의 상제(上帝) 혹은 하늘과 다르지 않다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유학의 가르침은 인격 수양의 수기(修己)와 국가운영에 관한 치인(治人)으로 요약할 수 있다. 정약용은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그 명령에 따라 사는 것이 수기의 근본이라고 보아 천주학을 받아들였지만, 치인에 관한 유교적 사회질서에 어긋나는 교리는 따를 수 없었다. 정조와 함께 정치개혁을 통해 유교적 이상을 실현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정약용은 기존 유교적 사회질서를 고수했던 것이다.
비록 천주교 신앙은 버렸지만, 천주교 정신과 서양의 근대문물에 대해 개방적인 태도는 잃지 않고 당시 지배이념인 주자학을 비판하면서 유학 안에서의 개혁을 일평생 꿈꾸었다. 정치생명이 끊어지고 가문이 폐족이 되는 극단의 고난을 겪으면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18년의 유배 기간에 온 힘을 다해 주자학을 넘어 새로운 유학을 시도했고 목민심서와 같은 사회개혁서를 저술했을 뿐 아니라, 의학, 음악, 장례법 등 다양한 분야의 백과사전적인 지식을 추구하는 등 실로 엄청난 학문적 업적을 이룩했다. 그의 삶 자체가 극심한 고난 속에서 불굴의 정신으로 일구어낸 인간승리라 할 수 있겠다.
유교적 사회질서가 공고했던 시대에 온몸으로 새 시대의 도래를 알렸던 정약종과 유교 내의 개혁을 평생 추구했던 정약용, 두 인물 모두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우리의 근대를 열어간 선구자로 기억되었으면 한다.
김완진 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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