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은 3·1운동 107주년을 맞이하는 해이다. 흔히 안동을 ‘한국 독립운동의 성지’라 부르는데, 그 이유는 분명하다. 국가보훈부에 따르면 서훈을 받은 독립유공자는 1만 8천569명에 달하며, 단일 지역 기준으로 경상북도가 2천242명, 그중에서도 안동 출신이 1천53명으로 가장 많다.
나라를 잃었던 100여 년 전, 의리를 택해 순국한 인물의 죽음을 ‘자정순국(自靖殉國)’이라 부른다. 이는 나라를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는 뜻이다. 왜적의 백성이 되는 것을 거부한 이들은 죽음으로 저항했다. 의병 항쟁 중 순국한 안동 출신 이중언은 “삶을 포기하는 한이 있어도 의리를 택하는 것이 성현의 가르침”이라며 동포들에게 분연히 일어설 것을 촉구했다. 의병장 이만도 역시 패망의 책임을 통감하며 24일 단식 끝에 생을 마쳤고, 안동 지역 유림들이 그 뒤를 따랐다.
자정순국을 선택한 이들 가운데는 지위 높은 관직자와 양반 유림이 많았지만, 남편의 순절을 따라 나선 부녀자들도 있었다. 이는 단순한 절망이나 도피가 아니라 식민 권력의 부당함을 거부하는 최후의 항거였다.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는 고귀한 신분에 따른 윤리적 의무를 뜻한다. 독립운동가들의 희생은 남는 것을 내놓은 것이 아니라, 가장 소중한 삶과 재산을 나라를 위해 기꺼이 포기한 행동이었다. 국가의 위기 앞에서 지도층이 먼저 나서 목숨을 아끼지 않는다면, 그 이름은 역사 속에 국민과 함께 기록될 것이다.
1911년 혹한 속에서 50여 식솔을 이끌고 서간도로 망명하던 석주 이상룡 선생은 압록강을 건너며 나라 잃은 비통함과 결연한 의지를 시로 남겼다. 그는 끝내 광복을 보지 못한 채 이국에서 생을 마감하면서도 “국토를 회복하기 전에는 내 유골을 고국에 옮기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의 아들 이준형 역시 1942년 자결로 항거했다.
안동 임청각은 대한민국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상징적 공간이다. 초대 국무령을 지낸 석주 이상룡 선생의 생가이자, 3대에 걸쳐 독립운동가 11명을 배출한 고성 이씨 가문의 종택이다. 독립자금이 부족해지자 이들은 종택을 팔아 독립군 자금으로 보탰고, 해방 이후에도 후손들은 가난 속에서 살아야 했다. 이병화와 허은 여사의 자녀들이 고아원 생활을 할 정도로 삶은 어려웠다.
안동 임하면 천전리 ‘내앞 마을’에서도 30여 명의 독립유공자가 나왔다. 이곳의 지도자 백하 김대락은 ‘삼천석 집’이라 불릴 만큼 부유했지만, 일가 친척 150여 명을 이끌고 만주로 망명해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었던 권세가였음에도 시대적 책임을 선택한 것이다.
또한 1919년 예안 3·1운동을 주도하고 창씨개명과 신사참배를 거부해 목사직에서 파면되고 여러 차례 옥고를 치른 이원영 목사도 있다. 그의 생가는 오늘날 한국기독교사적지로 지정되어 있다.
망한 나라와 무너진 공동체를 되살리기 위해 그들은 불꽃 같은 삶을 살았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과연 그들이 꿈꾸었던 나라에 살고 있는가. 사회 곳곳의 갈등과 분열, 이념 대립은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다. 국가적 위기 앞에서도 책임 있는 모습보다 정쟁에 몰두하는 정치 현실을 보며 깊은 자괴감을 느끼게 된다.
남부여대로 고국을 떠나 이국에서 풍찬노숙하며 독립을 위해 평생을 바친 선열들의 삶은 진정한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전형이다. 3·1운동 107주년을 맞아, 그들이 보여준 희생과 책임, 그리고 공동체를 향한 사랑의 정신을 다시 되새겨야 할 때이다.
조상인 장로
<안동 지내교회, 고암경제교육연구소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