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어느 날, 한 장로님의 일터에 심방을 갔을 때의 일이다. 대표실 한쪽 벽에 걸린 큰 액자에 ‘해현경장(解弦更張)’이라는 네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그 뜻을 찾아보니, 거문고의 줄이 느슨해졌을 때 단순히 조이는 것이 아니라 줄을 완전히 풀어(解弦) 처음부터 새롭게 고쳐 매야(更張) 비로소 제소리를 낼 수 있다는 말이었다. 오래된 한자성어이지만 울림이 깊었다. 느슨함은 단순한 조율이 아닌 근본적 재정비를 요구한다는 뜻이다.
이 사자성어는 한나라 유학자 동중서(董仲舒)가 황제에게 올린 글에서, 나라의 기강이 느슨해졌을 때 작은 손질로는 부족하며 근본부터 다시 세워야 한다는 뜻으로 쓴 표현이다. 줄 하나를 고쳐 매는 일이 단순한 악기 관리가 아니라 나라 개혁을 논하는 언어였던 것이다. 이 성어는 오늘 우리의 신앙과 사역에도 가볍지 않게 다가온다. 근본으로 돌아가는 재정비를 요구하는 말이다.
다윗의 수금 소리는 단순한 음악이 아니었다. 그것은 뒤틀린 영혼을 바로잡는 치유의 소리였다. (삼상 16:23) 그런데 그 아름다운 소리가 나오기 위해서는 먼저 수금의 줄이 팽팽하게 조율되어 있어야 했다. 느슨한 줄로는 결코 그런 소리를 낼 수 없다. 다윗은 연주하기 전에 반드시 줄을 고쳐 매었을 것이다. ‘해현경장’, 바로 그 일을 먼저 했을 것이다. 오늘 한국교회를 향한 시대의 목소리도 이와 다르지 않다. 최근 교회 현장에서는 프로그램과 사역을 돌아보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목회자도, 성도도 지쳐 있다. 더 많은 사역과 프로그램이 교회를 풍성하게 할 것이라는 믿음이 오히려 공동체를 소진시켜 온 것은 아닌지 돌아볼 때이다. 성도들이 원하는 것은 더 많은 행사가 아니라 깊은 영적 돌봄이며, 복잡한 프로그램이 아니라 말씀 중심의 단순한 공동체이다. 이것이야말로 교회를 향한 해현경장의 요청이다. 늘어난 줄들을 풀어내고 본질의 줄만 다시 팽팽하게 고쳐 매는 일이다.
우리의 사역도 다르지 않다. 연초의 분주함 속에서 어느새 우리의 줄도 느슨해져 있지 않는가? 느슨함은 소란스럽게 찾아오지 않는다. 바쁨을 핑계로 기도가 짧아지고, 말씀이 묵상 없이 지나가고, 서로를 향한 관심이 형식으로 굳어가는 사이 줄은 조용히 늘어진다. 문제는 그 상태에서도 연주는 계속된다는 것이다. 소리가 나오니 괜찮다고 여기지만 이미 불협화음이다.
‘해현경장’은 용기 있는 멈춤을 요구한다. 줄을 고쳐 매려면 먼저 연주를 멈추어야 한다. 기도의 줄을 새로 매려면 지금까지의 습관적 기도를 내려놓고 하나님 앞에 다시 무릎을 꿇는 시간이 필요하다. 응답보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 기다리는 기도, 나의 필요를 내려놓고 주님의 뜻을 구하는 기도로 돌아가야 한다. 말씀의 줄을 새로 매려면 익숙함에 가려진 본문을 처음 만나는 눈으로 다시 펼쳐야 한다. 오래 읽어 온 말씀일수록 우리는 본문을 보기도 전에 이미 안다고 생각한다. 그 익숙함이 말씀의 줄을 느슨하게 만드는 원인이다. 사랑의 줄을 새로 매려면 관계 속 피로와 오해를 먼저 풀어야 한다. 사랑은 감정이 아니라 의지적 선택이며, 불편함을 감수하고 먼저 다가서는 행동이다. 스쳐 지나쳤던 지체를 향해 손을 내미는 것, 그것이 사랑의 줄을 다시 고쳐 매는 일이다. 이 세 줄이 함께 조율될 때 우리의 공동체는 비로소 다윗의 수금처럼 이 시대를 향한 치유의 소리를 낼 수 있다. 지금 우리의 줄은 어떤 상태일까? 아직 팽팽할까, 아니면 이미 느슨해져 있을까? 아름다운 음악은 좋은 악기가 아니라 잘 조율된 줄에서 나온다. 주님께서 맡기신 사역의 자리에서 먼저 줄을 풀고 다시 고쳐 매는 ‘해현경장’의 시간이 되기를 소망한다. 그 재정비가 결국 이 시대를 향한 가장 아름다운 하나님의 음악이 될 것이다.
이요셉 목사
<대구평강교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