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은 미리 예비하셨다가 나를 부르셨다. 그 말을 들으면서 그저 그렇다고 믿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깊이 깨달아지지 않았다. 그런데 오늘 태평로 서울시의회 앞에 서니 그 말씀이 섬광처럼 머리에 꽂힌다. 1960년 4월 18일 우리 고려대학생들 3천 명은 교문을 박차고 안암골을 빠져나와 안암동 로터리를 지나 대광학교 앞으로 해서 신설동, 동대문을 거쳐 종로를 걸어 당시의 국회의사당이었던 이곳에 도착해 연이틀을 연좌데모에 돌입했다. 4.18 민주의거다.
3.15부정선거 다시 하라는 구호를 외치며 꿈쩍 않고 앉아 있었다. 자유, 민주, 정의, 진리의 기치를 들고 상아탑을 빠져나온 것이다. 그날 늦은 오후 유진오 총장님과 이철승 선배의 권유로 일단 우리들이 요로에 보낸 요구 사항의 대답을 기다리기로 하고 학교로 돌아갔다. 돌아가는 학생들을 청계천 4가 천일백화점 앞에서 정치 깡패들이 쇠몽둥이 등으로 무차별 가격하며 유혈이 낭자한 피바다를 만들었다. 이것이 직접적인 도화선이 되어 4월 19일 전국 각지에서 대학생과 시민들이 들고 일어났다. 4.19 혁명의 물결이었다.
4월 19일 등교하자마자 대오를 정비하고 아예 길 한가운데를 행진해 이곳에 앉았다. 계속 구호를 외치며 데모하는 우리 등 뒤로 피를 흘리는 부상 학생을 실은 차가 지나가자 우리는 흥분해서 떨쳐 일어났다. 우리도 ‘가자 경무대로’를 외치면서. 적선동 쪽으로 몰려가 대학생들이 경무대를 향해 돌진하자 시위대를 향해 발포해 사람이 다치고 급기야 사망했다.
그때 흥분해 일어서는 우리들을 주저앉힌 것은 우리의 총지휘자 이세기 선배였다. “우리 뜻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 우리는 목숨을 걸고 싸운다. 그러나 지금은 답을 기다릴 때다. 우리는 죽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우리의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 명연설에 다시 앉았고 나는 무사히 집으로 돌아갔다. 집에 도착한 그 순간 어머니가 대문을 밀고 나오는 것이 아닌가? 무작정 나를 찾아 나서는 길이었다. 그날 경무대 쪽으로 갔더라면 나도 이 자리에 없었을지 모른다. 어머니와 한 발만 비껴갔다면 어머니가 길에서 어떤 변을 당했을지도 모른다. 아아, 하나님은 그때 나를 지키신 것이다. 오늘 이 자리에 서서야 그 섭리를 깨달으며 목덜미를 만져본다.
오경자 권사
신일교회
수필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