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마리아, 신앙으로 민족을 깨우다
정신여학교 址 ③ (연지동)
정신여학교가 1978년 강남권의 개발과 함께 잠실동으로 이전하기 전까지 자리하고 있던 이곳 연지동에서의 역사는 국가적인 수치와 동란으로 인한 고난을 모두 감내해야 하는 곳이었다. 선교사들의 초기 사역으로 세워진 학교들의 공통점은 교육을 통해서 민족적 자각의식을 갖게 했다는 것과 함께 선각자들이 된 초기 학생들은 민족의 미래를 걸머져야 하는 사명을 깨닫게 했다. 따라서 민족이 당하고 있는 어려움을 모르는 척 할 수 없었고,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서도 앞장서야 할 일 또한 거부할 수 없었다.
정신여학교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다. 1919년 3.1독립만세운동을 계획하고 전개하는 과정에서 정신여학교 4회 졸업생인 김마리아는 당시 애국부인회 회장에 선출되어서 3.1독립만세운동을 주동했다.
그녀의 출생지는 묘하게도 한국의 최초 교회로 알려진 소래교회가 있는 황해도 장연군 대구면 송천리(松川理)다. 그곳에서 자라던 그녀는 3살 때 아버지를, 12살 때 어머니를 여의고 서울로 이사를 하면서 이화학당에 입학했다가 두 주 만에 연동(정신)여학교로 전학해서 이 학교를 다니게 되었다. 이 학교 재학 중인 1908년(17세)에 연동교회에서 세례를 받았고, 1910년 6월 19세에 이 학교를 4회로 졸업하고 바로 광주의 수피아여학교 교사로 부임해서 활동을 했다. 하지만 그녀의 꿈은 일본으로 유학해 터 크게 펼치는 것이었다. 1912년(21세) 히로시마고등학교에 1년 유학, 1915년에 다시 동경여자학원 본과(고등학교) 편입해서 한 학기를 마치고 바로 대학과정의 영문과에 입학해서 공부를 계속했다.
대학에 재학 중인 1917년 동경에서 유학하고 있는 여학생들의 친목회 회장을 맡게 되면서 그녀의 리더십이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1919년 1월 그녀는 친목회원들과 함께 조선청년독립단에 가입해서 활동을 시작했다. 조선청년독립단에 가입한 다음 달에 동경에서는 2.8독립선언이 있었고, 그 일로 체포되어 취조를 받게 되었다. 이때는 그녀가 대학졸업을 한 달 남겨둔 시점이었다. 취조를 받은 후 그녀는 2.8독립선언을 몰래 감춰가지고 귀국해서 자신의 고향인 황해도에서 활동을 하다가 3.1독립운동에 대한 소식을 듣고 서울로 올라왔다. 그리고 항일부녀단체를 조직해서 활동하려고 간사를 맡아서 준비하던 중 정신여학교 교무실에서 일본 경찰에 의해서 체포되었다. 결국 심문의 과정에서 고문을 받고 서대문형무소에 수감이 되었다가 고문 후유증으로 그해 7월 24일에 가석방되었다.
하지만 그녀의 애국심과 독립을 위한 투쟁의 여정은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이었다. 출옥한 후 정신여학교 교사로 부임을 해서 가르치는 일을 하면서 정신여학교 출신을 주축으로 형성된 애국부인회와 상해임시정부 산하의 대한청년회가 주도한 대조선독립애국부인회가 통합한 대한민국애국부인회의 회장으로 피선되어 국내외의 독립운동을 돕는 일에 앞장섰다. 결국 종로경찰서 형사들에게 체포되어 다시 고문을 당했다. 심한 고문후유증으로 더 이상 수감생활이 어렵게 되자 석방되었다. 그러나 1920년부터 대구 복심법원(고등법원)의 재판을 시작해서 경성(서울) 고등법원(대법원)에서 징역 3년형이 확정되기까지 그녀는 병원에서 치료를 받는 상태였다.
상해임시정부에서 파견한 윤응념의 권유로 망명할 것을 결심하고 1921년 7월 중국 위해로 망명에 성공했다. 하지만 고문의 후유증은 그녀의 발목을 잡았다. 그러한 상태에서도 상해임시정부의 요인(황해도 대의원)으로 상해국민대표회의 개막식에서 개막연설을 그녀가 맡았다. 1923년(32세)에 미국 로스엔젤레스로 이주해 미국에서의 공부를 시작했다. 파크대학(북장로교회) 3학년으로 편입해서 경제적인 어려움 가운데 공부를 마치고 시카고대학교 대학원으로 가서 1년간 사회학 연구생으로 공부를 했다.
시카고에 있으면서 모교인 정신여학교를 돕기 위한 모금활동을 했으며, 1928년에는 뉴욕으로 옮겨 여성항일단체인 근화회를 조직해서 활동을 했다. 그해 가을 콜롬비아대학교 사범대학원에 입학해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여기서 공부하면서도 그녀는 흥사단 단원으로 입단해서 독립운동을 계속했다. 1932년 미국을 떠나서 캐나다와 일본을 거쳐서 귀국했다. 돌아와서 그녀는 1933년 원산에 있었던 마르다윌슨신학원에서 교수로 일을 시작했고, 이듬해인 1934년 43세 미혼의 신분으로 전국여전도회 7대 회장에 선출되어서 10대까지 한국장로교회의 여성 지도자로서 활동을 했다. 그녀가 여전도회 회장으로 있을 때인 1938년에는 일제가 강요한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일을 주도했으며, 그가 가르치던 학교인 마르다윌슨신학원도 1943년에 폐교되었다. 이듬해인 1944년 그녀는 조국의 독립을 보지 못한 채 별세했다.
정신여고는 선배인 김마리아를 자랑스럽게 생각하면서 1989년에는 동상을, 1998년에는 그녀를 기념하는 건물(강당)을 지어 그녀의 이름을 붙였다.
이종전 박사
<인천기독교역사문화연구원 원장, 개혁파신학연구소 소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