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4·3 사건의 비극 속에 남은 순교의 증언
너무나 잔인한 살인행위였다. 이념의 차이가 사람을 이토록 잔인하게 죽인 것이다. 순교의 길은 이렇게 처참한 죽음으로 몰고 갔으나 그 끝은 하나님의 품이었다. 영광스러운 순교! 주를 위해 죽음을 극복한 이도종 목사, 그날이 바로 1948년 6월 18일 금요일이었다. 그때는 4·3 사건이 발발하고 두 달이 되어 폭동과 테러가 극심하던 때였고, 목사의 신분으로 중산간 지역을 순회하는 일은 목숨을 건 일이었다. 그의 순교를 아무도 몰랐다. 왜냐하면 아무도 없는 산에서 벌어진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시체가 발견된 것은 1년 뒤였다. 아직도 제주도 일대에는 군경 토벌대와 무장유격대의 전투가 치열하게 전개되어 제주도 전역의 주민들은 해안지대로 피했고, 그 빈집들을 모두 불사르며 산간 일대의 수목을 벌채하는 이른바 초토화 작전이 벌어졌다. 전소 가옥이 3만9천300채, 희생자 수는 수만 명에 이르렀다.
그러던 어느 날, 공산무장대원 한 사람이 배가 고파 마을로 밤중에 몰래 내려왔다가 붙잡혔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를 붙잡은 사람이 이도종 목사의 친동생 기종과 성종이었다. 그가 내려온 곳이 이도종 목사의 집이 있는 동네 부근이었다. 형제는 형님이 행방불명되었으므로 공산무장대에 대해 보복심이 있었다.
형제는 이 공비를 고산지서로 데리고 갔다. 그를 경찰에 넘기면서 이도종 목사의 소식을 알아봐 달라고 간곡히 부탁했고, 경찰이 그를 심문하는 가운데 이도종 목사에 관한 조사도 했다. 놀랍게도 그가 이도종 목사를 생매장한 그 현장에 있었던 공비 중 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심문 중에 이도종 목사의 순교 내용이 자세히 밝혀지게 되었고, 이도종 목사가 살해되어 매장된 장소를 알게 되었다. 대정읍 무릉리 인향동 부근이었다.
무장대의 안내로 이도종 목사의 가족들과 교인들, 마을 사람들, 치안관계자들이 인향동 부근 현장에 갔다. 생매장 당한 구덩이를 찾아 시신을 발굴했을 땐 이미 1년이 지나 부패해 형체를 알아볼 수 없었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에 자신의 영혼을 주님께 의탁하며 엎드려 기도하던 그 자세 그대로, 그날 아침에 입고 갔던 비둘기색 두루마기를 걸친 모습의 시신을 찾을 수 있었다.
“주의 죽은 자들은 살아나고 그들의 시체들은 일어나리이다 티끌에 누운 자들아 너희는 깨어 노래하라 주의 이슬은 빛난 이슬이니 땅이 죽은 자들을 내놓으리로다”(사 26:19).
그의 시체를 찾았다. 이도종 목사의 가족들은 부패한 시신을 만지며 한없이 울었다. 어제 산 사람과 이별하고 오늘 시신을 만나는 가족의 심정은 그야말로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으며 슬픔이 솟구쳤다. 그러나 가족들은 순교의 길을 가신 육친의 그 억울한 죽음이 오히려 영광의 길이었음을 알고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도했다.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계 2:10).
이승하 목사
<해방교회 원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