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어머니는 다섯 자식을 키울 수 있어도, 다섯 자식은 한 어머니를 못 모시는 부박(浮薄)한 세상이다. 부모가 죽으면 산에 묻고 자식이 죽으면 어미 가슴에 묻는다는 말이 있다. 그래서 사랑은 내리사랑이라고 한다. 90 평생을 오직 자식 잘되기만을 바라며 살아온 한 여인의 서글픈 삶이 있다.
청상과부로 오직 자식 하나만 바라보며 살았다. 자식이 삶의 전부이자 희망이었다. 자나 깨나 오매불망 자식 생각뿐인 ‘자식 바라기’. 하지만 갖은 고생 거칠어진 손마디와 희생 끝에 내몰린 곳은 요양원의 낯선 공간과 차가운 침대다.
90세 노모는 매일 창밖을 바라본다. 햇살이 좋아서가 아니다. 멀리 아들이 사는 집 쪽을 바라보는 것이다. 행여나 아들이 찾아올까 봐, 아들이 문을 열고 들어와 “엄마, 이제 그만 집에 가자”라는 그 한마디를 듣고 싶은 것이다. 그래 오늘도 온 마음이 창가에 매달려 있다. 평생 살아온 집, 익숙한 방, 정든 소품들이 있는 그곳에서 마지막 숨을 거두는 것이 어머니의 단 하나의 바람이었다.
전화가 걸려 오는 일도 드물다. 모처럼 찾아온 아들이 “어머니, 필요한 게 뭐예요?”라고 했다.
그토록 바라는 “집에 가보고 싶다”는 말을 하고 싶었지만 차마 할 수가 없었다. 부담을 줄까봐 삼키고 또 참았다. 그리고 겨우 말했다.
“다음 생이 있다면, 엄마는 네가 키우는 강아지가 되고 싶구나.” 한 맺힌 어머니의 피눈물 나는 고백이었다.
“예? 어머니?” “너는 현관문을 열 때 강아지를 보면 그렇게 환하게 웃더라. 그런데 엄마를 볼 때는 늘 무표정하더구나. 며느리도 강아지에게 먹을 것 챙기고 산책은 매일 시키면서, 볕이 쬐고 싶다는 엄마에겐 창가에 앉아 있으라 하더라. 강아지에게 주는 그 배려와 다정함을 조금만 내게 나눠줬어도 나는 참 행복했을 거다.”
어머니가 서운함을 말한 것은 아들을 원망해서가 아니다. “사람은 다 늙는다. 네가 나처럼 늙으면 내 마음이 너무 아플 것 같아 말하는 거다.”
인생의 마지막 장에서 자신이 버림받은 아픔보다, 훗날 자식이 당할 처지를 먼저 걱정하는 것. 그게 노심초사 어미의 마음이자 염려다. 자식은 비록 부모를 버려도 어미는 자식을 버릴 수 없다. 그리고 잊을 수도 없다. 부모님께 드리는 효도는 거창한 게 아니다. 세상이 아무리 각박해도 지금 당장 전화 걸어 “엄마”라고 불러보자. 그 목소리 하나에 어미는 목이 메고 가슴이 미어진다. 오늘도 어머니는 요양원의 그 삭막한 창가에서 집을 바라보고 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가 땅에서 잘되고 장수하리라.”
부모가 강아지보다 못한 존재인가? 때가 있다. 늦기 전에, 서글픈 삶을 마감하기 전에 지금 당장 부모를 찾아뵈어라. 그리고 어머니의 그 손을 꼭 잡아드려라. 그것이 가정의 달, 우리를 키워낸 부모에 대한 최소한의 도리이자 본분이다.
두상달 장로
• 국내1호 부부 강사
• 사)가정문화원 이사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