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시절 아버지가 납치되어 순교하실 때에 저는 10살이였어요.”
인터뷰를 위해 지난 12월 1일 만난 김창길 목사는 6·25 당시 납북되어 순교하신 故 김동철 목사의 아들이다. 미국에서 사역을 이어가고 있는 김창길 목사는 지난 11월 29일 서소문교회에서 열린 故 김동철 목사
의 순교 70주년 기념예배를 드리기 위해 잠시 귀국하였다.
김창길 목사는 “우리는 당장 화형을 당하거나 총에 맞아 죽지 않았더라도 가족과 이별한 채 북에 강제로 끌려간 순교자를 기억해야 한다”며 아버지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故 김동철 목사에 대한 기억
“아버지의 이름은 김동철(金東哲)이고 호는 야성입니다. 지금 살아계신다면 121세가 되시지요. 함경북도 길주 태생으로 열 살 때 간도로 이주해 와서 예수를 영접하게 되셨어요. 1945년 말 경 해방 이후 중국이 공산화되어 가던 시대상황 속에서, 점점 심해지는 기독교 박해를 피해 남쪽으로 내려가자는 어머니의 바람이 있었어요. 당시 만주 신경에서 신경교회의 담임목사셨던 아버지는 교인들을 버리고 갈 수 없다며 반대하셨지만, 교인들을 일일이 찾아 다니며 함께 남쪽으로 가자고 권면하신 어머니의 기지로 교인 모두 함께 만주 신경을 떠나오게 되었지요.”
이렇게 서울로 내려와 현재 조선족이라 불리우는 만주동포를 위해 지은 서울 최초의 교회가 서소문교회라고 설명했다.
“서울로 내려온 후 4년 4개월 만에 또 다시 6·25가 일어났어요. 만주에서 공산군에게 여러 번 시달리셨던 어머니는 피난을 가자고 하셨지만, 선한 목자는 생명 바쳐 양을 지켜야 한다는 사명과 교인에 대한 사랑이 투철하셨던 아버지는 ‘교인을 두고 나만 살려고 떠날 수 없다’며 서울에 남아 교회를 지키려 하셨습니다”라며 故 김동철 목사께서 가지고 있던 교인들을 위한 사랑과 그의 목회 의지를 전했다.
여러 시간의 논쟁 끝에, 둘째 아들과 아버지는 서울 교회에 남고, 나머지 가족은 남쪽으로 피난을 가기로 했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한강다리를 건너려 삼각지 로터리를 막 지났을 때 하늘이 갑자기 불바다가 되면서 대낮처럼 환해지고, 요란한 폭격 소리와 함께 한강 다리가 끊어졌어요. 결국 큰형만 암편 배로 부산으로 내려가고 그 외 가족들은 서울에 남게 되었지요.”
“당시에는 서울 사대문 안에 교회가 많지 않았어요. 많은 교회들이 피난을 가고, 남아있는 사람들은 예배드릴 장소가 마땅치 않았지요. 그래서 많은 이들이 서소문교회로 와 함께 예배드렸답니다. 아버지께서는 교인을 지키고 돌보는 것과 주의 명령에 따라 주일 예배를 지키는 것, 이것을 생명 다해 지키셨던 분이세요.”
납북된 그날 …
어머니께서 마포에서 감자를 떼어 남대문 시장에 팔아 가족이 생계를 이어갔다고 이야기한 김창길 목사는 아버지께서 납북되어지던 때를 회고했다.
“새벽같이 감자를 떼러 가신 어머니를 아버지께서 마중 나가셨던 시간이였어요. 그때 한 청년이 아버지를 찾아왔어요. 집에 아버지가 계시지 않자 그는 아버지가 돌아오시기를 숨어서 지키고 있었어요. 어머니와 함께 돌아오신 아버지가 들어오셔서 감자 자루를 내려놓고 기도하는 순간 돌아간 줄로만 알았던 그 청년이 문을 열고 들어왔어요. 아버지의 기도가 끝나기를 기다린 그 청년은 아버지에게 누런 봉투의 편지를 전해줬어요. 서울 시내 목사님들이 모인다는 이야기였던 것 같아요. 그렇게 아버지께선 ‘어머니께 내가 회의에 참석한다고 얘기해라’는 말을 남기시고 모시적삼을 입으신 채 그날 이후로 납북되셨어요.”
8월 23일 새벽녘에 故 김동철 목사는 아들인 김창길 목사의 눈앞에서 청년의 거짓말로 납북되었다. 해방촌교회, 서교동교회, 새문안교회, 신당동중앙교회 등 서울 시내의 여러 목사님, 여러 기독교 지도자들이 같은 날 잡혀갔다고 했다.
“피할 길도 없이 그렇게 데리고 가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어요. 그렇게 아버지와 헤어졌고, 생사를 알지 못한 채 시간이 지나갔습니다. 그러던 중 동아일보 ‘아오지의 恨’이라는 신문 기사를 접했고, 이를 통하여 아버지께서 1950년 12월 납북되어지던 중 압록강 만포 부근에서 장티푸스에 걸려 순교하셨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죠.”
이어 김창길 목사는 아버지에 대해 이렇게회고했다.
“어릴 적 십대 때에는 고생하시며 홀로 6형제를 기르시는 어머니를 보며, 아버지가 원망스러웠습니다. 하지만 제가 신학을 하고 목회자가 되면서 아버지의 순교가 고귀하신 일임을 느끼게 되었어요. 사도행전 20장 24절에 보면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라는 말씀이 나와요. 그 말씀을 읽으며, 아버지도 바울과 같은 길을 가며 목사의 사명을 다하셨구나 생각합니다. 그저 살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를 지키고, 교인과 함께 하기 위해 그리고 외부의 위협에 굴하지 않고 신앙을 펼치기 위해 자기 생명을 조금도 중하게 여기지 아니하였다는 것, 그것이 아버지의 신앙이였어요.”
유가족을 도운 손길
서울에 북한군이 다시 쳐들어오고 서울이 한산해졌을 때, 선교사들이 목사 가족을 위하여 준비해 준 기차를 탈 수 있는 마지막 찬스가 생겼다고 한다. 김 목사의 가족은 버티다 못해 결국 부산으로 피난을 갔다.
“기차가 가다서다를 반복하며 결국 보름이 걸려 부산에 도착했어요. 그곳에서 우리 가족을 도와준 분들이 부산 남교회의 한 목사님이셨습니다. 일주일 동안 교회에 묵게 해 주시고, 부흥회를 열고, 얼마의 위로
금을 나누어 주셨지요. 그걸 기반으로 우리는 부산 시내를 헤매게 되었어요.”
그렇게 얼마 후 기독교세계봉사회(CWS)에서 부산 범일동에 미실회(美實會)라는 순교자 유가족을 위한 처소를 만들어줬다고 한다. “다다미 8장 정도에 부엌이 붙어 있고, 화장실은 공동으로 사용하는 50여 호 가량의 집이 모여 사는 곳이였어요. 당시 미실회 총무는 H.D 아펜젤러 박사로 감리교 목사였습니다. 배재학당을 창설한 H.G 아펜젤러 박사의 아들이었어요. 그분이 우리를 3년 동안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나사렛, 구세군 등 모두 한데 모여 살게 도와주셨어요.”
미실회는 초교파로 유가족들에게 오랫동안 거처를 마련해 주었다고 전한 김 목사는 “부산에서 환도할 때까지 함께 동거동락한 사랑과 눈물이 가득한 기쁨의 보금자리였다. 함께 모여 살던 사모들은 초량에 가서 삯바느질을 해 봉급을 받아 생계를 이어갔고 가끔 미국에서 오는 구제품을 배급받았다”며 부산에서의 기억을 떠올렸다.
김창기 목사는 “3년 후 서울이 환도가 되어지면서, 통합 측 교단에서 장충동 2가 162번지에 순혜원(殉惠園)을 만들었다. 그곳에 20여 가정의 장로교 순교자 유가족들이 함께 모여 살았다. 이후에는 서소문교회에서 몇 년간 사택을 빌려주어 그곳에 머물게 되었으며, 이후 독립해서 나오게 되었다”며 도움의 손길들에게 감사함을표했다.
순교 문화를 세우자
“순교는 화형을 당하거나 칼에 베여 죽는 그런 죽음만이 아닙니다. 살기 위하여 피난을 가는 와중에도, 교회와 교인을 자기 생명보다 더 귀하게 여겨 끝까지 지키다가 납치되어 병약자가 되어 죽어간 사람들도 포함됩니다. 우리는 순교자의 정의를 예수님과 교회를 위해 죽기까지 핍박과 고난을 당한 사람으로 칭해야 합니다. 신앙의 주체성 없이 순교를 할 수 없으며 순교 정신은 교회를 부흥시킵니다. 외국인 순교자 이름을 거명하고 부끄러워하지 말고 우리 선배 순교자들을 한국교회와 교단이 나서서 발굴해 주시기 바랍
니다.”
인터뷰/석상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