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아코니아] 가지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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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앞을 산책하다 보면 가을이 깊어졌음을 느낍니다. 겨울이 가까워 올수록 나무들은 풍성함을 자랑하던 나뭇잎들을 아낌없이 떨어버리며 무성하게 뻗어갔던 가지들을 쳐내가고 있습니다. 무서우리만큼 철저히 모든 것을 떨어드립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떨어뜨린 나무만이 그 이듬해에 더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16세기 지배 계급이었던 영주들의 횡포로 사람들은 살아가기가 힘이 들었습니다. 여성들의 다수가 빈곤에 처했고 중세 후기 교회에서 활동한 수사들, 신부들, 탁발 수도승들 사이에서 자발적 가난이 유행처럼 퍼져 나갔습니다. 가난한 자들은 구걸을 통해 가난을 해결하려 했고 구걸하는 사람을 돕는 행위가 구원을 이룬다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사고가 로마 가톨릭 교회를 병들게 했고, 루터는 구걸하는 행위와 자선행위를 신학적으로 정당화시키는 구원 이데올로기를 신랄하게 비판했습니다. 구걸행위는 이웃 사랑의 반대이며 하나님의 질서와 계명의 위반의 결집이요, 부도덕의 시작이라 했습니다. 직업교육이나 구직을 적극 권했고 운명적인 가난이나 질병, 양육자의 죽음으로 인한 경우에는 공동체가 생계를 안전케 하는 의무를 갖게 했습니다. 이런 점에 루터는 복지를 위한 디아코니아적 신학을 체계화시킵니다. 모든 구걸행위를 폐지시키는 법을 공포했으며 빈자보호법을 통해 곤경에 처한 이들과 가난한 사람들을 효과적으로 돌보게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루터는 평신도 위에 성직자 계급이 존재한다는 중세의 사회계급질서를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개념에 근거해 무너트렸습니다. 교회가 사회에 지탄을 받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모든 직업이 제사장처럼 중요하지만 목회자가 특권 계층이 되어버렸고, 교회가 청빈을 부르짖지만 실제로는 높은 자리에서 부와 권력을 다 소유하려고 하는 이중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자선행위를 통해 구원받는다는 잘못된 생각에서 벗어나기 위해 믿음만을 강조했습니다. 이러한 잘못된 신앙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바로 잡아주는 것, 바로 가지치기를 하는 것입니다. 가지치기를 통해 새로운 가지가 자라게 하고 그 가지에서 열매를 맺도록 해야 합니다. 디아코니아 정신에는 평신도와 목회자가 수평적 관계입니다. 모든 직업이 주님이 주신 일입니다. 신앙은 이웃을 돌아보는 선행과 하나님을 향한 믿음, 모두를 포함합니다. 

505년 전 신앙의 선배들은 교회 안에 남아 있는 비성경적인 것들을 제거하고 오해와 왜곡된 모습을 바로잡아 하나님께서 원하셨던 교회의 본질을 회복하기 위해 개혁, 가지치기 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모습 속에 이러한 개혁과 가지치기가 멈춰버린 것은 아닌지 깊이 있는 자기반성이 필요합니다. ‘개혁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는 종교개혁자들의 외침처럼 끊임없이 개혁되어지는 교회와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종교개혁주일을 맞아 우리가 먼저 겨울을 준비하는 나무처럼 가지를 쳐냄으로 따뜻한 봄날, 건강하고 풍성한 생명의 움을 틔우게 되길 바랍니다. 

김한호 목사 

<춘천동부교회 위임목사•서울장신대 디아코니아 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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