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일저일 생각하니] 끝내 안 믿고 간 대신중 수학담당 윤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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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도 3월에 부임해 간 대신중학 교무실에서 윤 아무개 동갑내기(1937년 생) 수학선생을 만났다. 중학 3학년 동학년 담임으로 친한 벗이 되었다. 그는 파주 시골 출신으로 서울 명문 경복고교, 고려대 수학과를 졸업했다. 파주 사는 동네에서 명문 고교와 대학에 진학했다고 축하잔치도 열어 주었다고 했다. 마음은 착하고 순수했다. 그런데 술은 심히 즐기고, 마음씨도 고와서 후배들에게 술을 자주 사주어 인기도 있었다. 청백군으로 나누어 교직원 축구할 때 윤 선생은 문지기였고 나는 문을 지키는 수비수였다. 3학년 6반 그의 반에서 내가 국어수업 중인데 출석부를 찾아가며 “너희들 선생님께 어려운 질문은 하지 마라” 웃으며 농담을 남기고 갔다. 분명 농담인데도 나를 실력없는 선생으로 모욕을 주었기 때문에 나는 큰 상처를 받았다. 내색은 안 했으나 말 조심이 없는 윤 선생이 조금은 미웠다. 

나는 자주 내가 믿는 하나님을 함께 믿자고 전도했다. 그때마다 실없이 “오 선생 세종대왕 이순신이 천당 갔어? 지옥 갔어?”하며 뚱딴지 같은 소리로 나의 전도 권면의 말을 얼버무려버리곤 했다. 나는 “당시 교회가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만 아실 일”이라고 대답해 주었다. 연세대 명예교수 김동길 박사는 ‘대통령의 웃음’ 저서에서 이순신은 그 당시 교회가 없어 못 다니셔도 우리나라 위기를 건진 성스러운 일을 하였기에 하늘나라 베드로 곁에 서 계신다고 말씀했다. 전도하면 초등학교 어린이 같은 질문만 하던 윤 선생은 사립 초등학교 6학년이던 외아들 윤군이 일산 사는 동네 문방구에서 도화지를 사들고 찻길을 건너다가 타이탄 트럭에 치었다. 영등포 어느 교통병원에 입원했다. 내가 1980년대 고교 교무실로 옮겼으나 윤 선생은 자주 만나고 친한 동료교사이므로 1980년대 중반 무렵 여름에 우리 화성교회 장경재 목사님 모시고 윤 선생 아들 심방을 갔다. 온통 머리 수술이 되어 있고 주사바늘이 머리에 여러 개 꽂혀 있었다. 

장경재 목사님이 은혜 넘치게 기도하고 나도 윤 선생 교회 나갈 것과 아들 쾌유를 기도했다. 그 무렵 윤 선생과 윤 선생 교직 친구이자 나와 연세대 국문과 동기인 최병탁 선생하고 병원 근처에 술 마시러 갔다고 했다. 두 교사 부인이 우리 남편들 교회 나가게 해 달라고 내게 단단히 부탁했다. 그 후 윤군은 퇴원했으나 정신이 좀 이상했다. 김한수 대신고교 교장 선생님 배려로 학교 진학은 되었으나 사회문제가 많았다. 윤군이 고1때 부모가 퇴근해 보니 윤군 방 화재로 윤군은 사망해 있었다. 서대문 세란병원 장례식장에 유해가 안치되어 있었다. 나는 장경재 목사님 모시고 윤군 영안실에 가서 위로 기도를 해 드렸다. 부모는 영안실에 없고 삼촌 혼자서 영안실을 지키고 있었다. 술도 잘 마시며 자기 몸을 바위나 쇳덩이로 알았던 윤 선생도 위암에 걸려 병원 신세를 지기 시작했다. 세브란스병원에 입원 중일 때 내가 심방 가서 간절히 쾌유를 비는 기도를 했다. 기도로 하나님 은혜로 병낫게 해주십사 기도하며 길과 진리 생명 되시는 예수님 믿으라고 권면 했으나 긍정적 대답은 없었다. 십자가를 바라봐야 할 윤 선생의 두 눈은 전도하는 나의 얼굴을 보며 결코 아멘소리를 몰랐다. 끝내 예수님 안 믿고 50대 초반 나이에 마지막 눈을 감았다. 이화여고를 졸업하고 교편을 잡으며 윤 선생이 믿는 남편되길 기도해 온 아내는 성령충만하게 기도했으나 남편과 아들만 다 잃는 슬픔만 맞게 되었다. 참 안타까운 일이다. 시편 14편에 마음에 하나님이 없다 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라 했다. 명문고 명문대를 나와도 마음에 하나님 안 계시면 어리석은 사람이다. 어리석은 사람으로 떠나가도 가신지 20년이 넘은 수학담당 윤 선생이 마냥 그립다.

오동춘 장로

<화성교회 원로, 문학박사,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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