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로] 행복한 선택  박래창 장로의  인생 이야기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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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리에스테르 원사에서 시작된 성공 신화

폴리에스테르 원사의 재발견과 새로운 시장 개척

유행 선도한 ‘월남치마’ · ‘몸빼바지’의 성공 비결

그때 신앙촌 전도관장의 지인을 통해 우리가 전해들은 얘기는 “시온합섬에 가면 폴리에스테르 원사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는 것이었다. 당시에는 수입 원료로 생산한 물품은 5~7%만 남기고 다시 수출해야 한다는 규제가 있었기 때문에, 당시 전량 수입 원료로 생산했던 폴리에스테르 원사는 돈을 주고도 사기 어려웠다. 그런 고급 원사가 그렇게 많다는 얘기가 선뜻 믿기지는 않았지만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으로 경남 기장군에 있는 공장으로 찾아갔다.

가보니 정말 엄청난 분량의 폴리에스테르 원사가 쌓여 있었다. 일본에서 수입한 기계로 뽑아낸 원사였는데 기술 부족과 낡은 기계 탓에 전부 불량품이 돼 있었다. 필라멘트 굵기가 처음부터 끝까지 고르지 않아 직조를 한 뒤 염색을 해보면 색이 얼룩지게 나왔다. 그러다 보니 밝은 색은 안되고 검은 색으로만 염색해야 했다. 그런 제품은 상품 가치가 없었기 때문에 판로를 찾을 수가 없어 더 이상 작업을 진행하지 못하고 공장이 멈춰 있었던 것이다.

공장을 둘러보니 원사 기계뿐 아니라 니트 천을 짜는 직기도 아주 좋은 것이 영국에서 수입돼 있었고, 네덜란드에서 수입된 한국에 한 대밖에 없는 ‘붓자’ 날염 기계, 로타리 날염 기계도 있었다. 이 기계들은 60인치 규격으로, 당시 44인치가 대부분이었던 기계들보다 다양한 프린트를 할 수 있는 최신 기계였다. 동행했던 기술자는 “원사 상태가 안 좋아서 구입해봐야 쓸 수가 없다”고 했다. 본래 여성 양장 원단용 원사를 구하러 온 것이라 그 말이 맞았다. 하지만 기계들을 둘러보던 내게는 다른 생각이 떠올랐다.

‘염색이 안 되면 날염을 하면 어떨까?’

이곳의 니트 기계로 신축성 있는 저지 원단을 짠 뒤, 거기에 이곳의 최첨단 프린트 기계로 60인치 니트 날염을 찍으면 지금까지 없었던 한국 최초의 신상품이 나올 것 같았다.

바로 서울에서 날염 기술자들을 불러왔다. 과장급으로 기술이 좋은 사람들로만 팀을 조직해 공장을 풀가동했다. 원사가 불규칙하니 무늬는 주로 화려한 꽃무늬를 찍었다. 폴리에스테르 저지 소재의 60인치 날염 양장지를 최초로 생산한 것이다.

그렇게 만든 원단을 서울로 가져가 동대문종합시장에 내놨다.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신축성 있는 저지에 화려한 꽃무늬가 프린트된 원단은 마침 새롭게 유행을 맞은 헐렁한 여성복 생산에 쓰였다. 바로 ‘월남치마’와 ‘몸빼바지’였다.

해방 이후 197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한국 여성들에게는 옷을 헐렁하게 입는 문화가 없었으며, 서양 복식은 모두 딱 맞게 입는 것으로만 인식됐다. 여성의 사회적 활동과 자유로운 문화는 커지고 있었는데 복식이 이를 따라가지 못하는 형국이었다. 그런 가운데 나타난 ‘월남치마’와 ‘몸빼바지’는 하나의 혁명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이후 1년간 시온합섬 공장은 풀가동됐다. 밤새 만든 원단을 4t 트럭 한두 대에 싣고 새벽에 올라와 동대문에 내려놓으면 거래업자들이 기다리고 있다가 앞다퉈 싣고 갔다. 미리 선금을 맡겨둔 이도 있었고, 더러는 너무 경쟁적으로 가져가는 바람에 미처 계산서를 못 떼기도 하였다. 그래도 신나게 일할 수 있었다.

우리는 원사를 싸게 사서 좋은 값에 팔았기 때문에 큰 이익을 남겼고, 시온합섬으로서도 골칫거리 원사를 처리하는 동시에 공장이 돌아가게 되어서 신앙촌 구성원들이 일을 할 수 있었으므로 서로에게 ‘윈-윈’이 되는 일이었다.

 이 일은 우리 회사가 크게 도약하는 계기가 됐다. 대부분의 사업하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기회들이 몇 번씩 찾아온다. 지금 대기업으로 성장한 기업들은 그런 기회들을 꽤 많이 만났고, 그에 제대로 대처한 곳들이다. 그냥 하루하루 똑같이 벌어서 똑같은 이익을 남기는 일만 계속해서는 성장할 수가 없다. 그래서 경영자는 기회에 민감해야 하고 그 영향과 가능성을 잘 판단해야 한다.

물론 일이 안 풀리는 때도 있다. 그러나 그럴수록 더 몰입하고 집중하다 보면 ‘반짝’하고 기회가 생각에 들어온다. 그것을 찾아내기 위해 늘 감각을 날카롭게 다듬고 몰두하는 것이 비즈니스를 하는 사람과 직장인의 다른 점이다. 그렇게 방법을 찾다 보면 하나도 없어 보이던 탈출구가 불현듯 여러 개씩 동시에 생기곤 한다.

이 두 가지 사건은 내게 큰 의미를 가진다. 이를 통해 ‘디자인’ 감성에 눈을 뜨게 되었고 신소재의 중요성을 절감했다. 자연히 관심은 시대를 한 발짝 앞서 가면서 과감한 도전을 하는 서구 패션으로 향했다. 물론 그동안에도 신상품 개발을 위해 전문가들과 함께 새 패턴을 구상하기는 했지만 그 수준을 넘어서서 최첨단의 패션 트렌드를 알고 싶어졌다. 국내 트렌드를 분석하는 것만으로는 시장을 선도할 수 없다는 판단이 들었던 것이다. 우리 나름대로 괜찮다고 생각하는 정도로는 사람들을 설득하기도, 시장의 반응을 예측하기도 어려워지고 있었다. 그렇기에 유럽으로 시장조사를 나가 앞선 패션 트렌드를 직접 보면서 안목을 길러야겠다고 결심했다.

돌아보면 이런 발상을 할 수 있는 결단 하나하나가 절묘한 하나님의 인도하심이었다. 내가 준비하고 기획한 일보다는 돈 대신 어쩔 수 없이 가져온 수출 재고품이나 우연히 만들어낸 제품이 내게 새로운 방향을 제시해준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그렇게 잘 팔릴 줄 몰랐다고, 횡재했다고 좋아만 해서는 발전할 수가 없다. 잘 팔리는 이유를 분석하고 체계적으로 대응해야 그 다음에는 운이 아닌 진짜 실력을 통해 적중시킬 수 있다.

이런 경험을 거치면서 우물 안 개구리였던 나는 벽을 뛰어넘고자 점프를 시작하게 됐다. 그 일이 아니었다면 세계 트렌드 분석에 나서겠다는 결심을 하지 못했을 것이고 사업이 그 후로 오래가지 못했을 수도 있다. 

박래창 장로

<소망교회 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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