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로] 행복한 선택  박래창 장로의  인생 이야기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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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도 위기, 신앙의 확신으로 정면 돌파 성공

채권자 설득 · 패션 산업 변화로 부도 위기 극복

칼라 TV 방송 시작, 교복 자율화 ‘수요 폭발’

김 회장은 잠적했고 주변에서는 내게도 “빨리 있는 것 챙겨서 도망가라”고 충고했다. 책임져야 할 부채가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규모라 어찌해야 할지 판단이 안 섰다. 닷새 정도는 밖에 나가지 않고 은거했다. 그런 와중에도 새벽이면 교회에 나가 기도를 했다. 절박했기 때문에 그만큼 더 간절한 기도로 무릎을 꿇었다. 당시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남은 재산을 챙겨서 도망가는 것과 정면 돌파를 하는 것 두 가지뿐이었다. 새카맣게 타들어가는 마음으로 매일 새벽 교회에 나가 하나님께 매달렸다. 걸어가면서도 기도하고 밥을 먹으면서도 기도했다.

이때는 하필이면 내가 고등부 부장으로 임명된 직후였다. 소망교회 고등부가 창설되고 첫 부장을 맡았다. 전두환 정권이 들어서서 바로 고교평준화 정책을 발표하자 교회는 중·고등부였던 조직을 중등부와 고등부로 분리하기로 했다. 중·고등학교 입학시험이 없어지면 공부 부담이 적어진 학생들이 교회로 많이 모일 것으로 예상하고 준비하는 차원에서였다. 소망교회는 당시에도 ‘8학군’의 상징이었던 강남구 압구정동에 위치하고 있었기에 적절한 판단이었다. 상가 건물 2층 피아노 학원이었던 곳을 임대해서 고등부 예배실로 새로 꾸몄고, 곧 이곳에서 소망교회 고등부가 창립될 예정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부장을 맡은 내가 회사가 망해서 도망갔다고 하면 교회와 교회학교에 얼마나 누가 될 것인가를 생각하니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런 와중에 또 하나의 사건이 벌어졌다. 소망교회 당회 창립 1기 장로로 내가 피택된 것이다.

괴로운 마음으로 기도하던 중에 마음에 확신이 떠올랐다.

“하필 이때 나를 고등부 부장으로, 장로로 부르신 것은 하나님께서 나를 구해주시겠다는 싸인이다!”

이 생각이 들기 전이나 후나 상황은 똑같았지만 마음가짐은 전혀 달라졌다. 채권자들이 두렵지 않았다.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두려움으로부터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라고 한다. 두려움을 극복하고 평정을 찾을 수만 있으면 길이 보인다. 도망가면 확률이 제로(0)이고 정면 돌파를 하면 성공 확률이 아무리 못해도 1% 이상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못할 일이 없다. 성공은 실패를 넘어서는 것이다. 실패를 건널 다리를 찾으면 성공이 보인다.

나는 채권자들에게 통보하고 바로 다음날 사무실로 나갔다. 예상한 대로 채권자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내가 제 발로 나타나자 모두 깜짝 놀란 표정이었다. 나는 담담하게 현재의 재정 현황을 구두로 보고했다.

“보시다시피 재정 상황에는 문제가 없습니다. 저희 제품의 성장성이 좋은 것은 여기 계신 분들도 잘 아실 것입니다. 조금만 여유를 주시면 지불 보증한 것을 다 갚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말하고 나니 마음이 잔잔한 바다처럼 가라앉았다. 긴 이야기도 필요 없고 구체적인 설득도 안 통하는 상황이기에 서류를 제시할 필요도 없었다. 그저 있는 그대로만 말했다. 최악의 경우, 우리 회사 은행 당좌계좌가 부도나면 감옥에 갈 수도 있었다. 어음부도는 민사사건이지만 당좌수표 부도는 형사사건으로 그 당시는 대부분 구속이 됐다. 그럼에도 두렵지 않았다. ‘감옥에 가게 되면 가는 거지’라고 각오했다.

다행히 대부분의 채권자들은 김 회장과 좋은 관계를 유지해왔던 분들로 패션 섬유 사업의 성장성을 잘 알고 있었다. 채권자들은 한참 상의를 하더니 한 사람이 대표로 이렇게 말했다.

“박 사장이 운영하는 회사는 아직 가능성이 있으니 기회를 드리겠습니다.”

어음 기한을 연장해서 순차적으로 갚으라는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적은 금액 어음은 6개월, 큰 금액 어음은 1년 기한의 우리 회사 어음으로 재발급해주는 방법으로 연장을 받았다.

이렇게 해서 도망가지 않고 일단 사업을 이어 나갈 수 있게 되었다. ‘매일같이 돌아올 어음을 막아나갈 수 있을까?’라는 불안감은 여전히 남았지만 어려운 고비를 정면으로 돌파해보자는 용기도 생겼다.

하나님의 유격훈련을 

성공적으로 감당하다

얼마 후, 예상치 못한 일이 생겼다. 최악의 혼란에 빠진 사회의 관심을 다른 쪽으로 돌리기 위한 전두환 정권의 파격적 조치들 중 하나로 컬러 TV 방송이 1981년 1월부터 시작된 것이다. 25년 동안 흑백이었던 TV 화면이 색깔을 입은 것은 당시로서는 대단한 사건이었다. 또 다른 사건은 정부가 중‧고교 학군제 및 고교 평준화와 함께 교복 자율화를 선포한 일이다. 수십 년 동안 교복만 입었던 중‧고교 학생들이 사복을 입게 되었다.

이 두 가지 사건은 군사정권의 정치적 시도였지만, 우리 회사에는 기회가 되기도 했다. 한국 경제 및 사회에 ‘패션 비즈니스’라는 키워드가 떠오른 것이다. 엄청난 규모의 새로운 패션 시장이 하루아침에 갑자기 생겨났다. 그동안에는 양장점 또는 양복점에서 옷을 맞춰 입던 시장이 브랜드 상품이 주도하는 완성복 시장으로 바뀐 것이다. 삼성, 엘지, 코오롱, 제일모직 등의 대기업은 물론 평화시장, 남대문시장에서 소규모로 양장점을 하던 사람들까지 경쟁적으로 브랜드를 만들기도 하고 해외 브랜드를 도입해서 패션 회사를 차렸다. 톱클래스 디자이너들도 경쟁적으로 자기 브랜드를 걸고 회사를 창립했다. 그때 소규모 사업을 하던 패션업자들이 지금은 대부분 대기업으로 성장했다.

이에 발맞춰 패션 의류용 원단 소재에 대한 수요가 폭발적으로 커졌다. 앞에서도 설명했듯이, 그때까지만 해도 수출용이 아닌 국내 수요 의류용 원단은 일체 수입이 금지돼 있었다. 국내 섬유산업 보호정책의 일환이었다. 이 때문에 패션 의류에 걸맞는 원단을 국내에서 찾아내기 위해 패션 회사들이 치열한 경쟁에 나섰다.

박래창 장로

<소망교회 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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