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여정] 서당에 입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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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의 추위는 아직 맹위를 떨치고 기승을 부리는 세찬 바람과 얼음장 위로는 썰매를 타는 아이들도 추위를 물리치느라 하천 둑에서 옹기종기 입김을 호호 불고 있었지만 개천의 양지바른 곳에서는 버들강아지가 잔뜩 망울을 부풀리고 있었다. 그리고 인근의 산수유도 꽃잎을 한껏 부풀리고 있었다. 말하자면 겨울 속의 봄이었다.

무언가 마음을 설레게 하는 1956년도의 2월 말쯤 나는 회남국민학교를 졸업하게 되었다. 아버지 어머니의 손을 잡고 일찍 졸업식장에 가보니 시골의 벽촌 마을의 학교에서도 그날따라 만국기가 펄럭이고 한껏 분위기를 돋우려는 듯 풍금소리가 운동장 쪽으로 신나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그날만큼은 마을의 내로라 하는 유지들과 외부의 제법 저명한 인사들로 보이는 근엄한 어른들이 당시에 유행하던 멋지고 깔끔하게 보이는 한복을 입고 정좌하고 있었다. 선생님들도 정장을 입은 깨끗하고 점잖은 모습으로 긴장한 모습이 역력했다. 지금은 교육 체제상 개인주의로 많이 탈색되었지만 당시만 하더라도 학교는 최고의 존엄기관이요 선생님은 그야말로 하늘과 같은 존재감으로 존경과 존중을 한 몸에 받던 시대였다.

아버지, 어머니와 함께 졸업장과 우등상을 받고 교사가 전부 보이는 운동장에서 막 졸업 기념사진을 찍고 있는데, 어느덧 담임선생님께서 가까이 오시는 게 아닌가, 그동안 늘 공부하며 일등을 놓치지 않는 나를 더욱 칭찬하고 격려해주며 친자식처럼 아껴주던 선생님이라 순간 감회가 더할 수밖에 없었다. 내 곁으로 다가오신 선생님은 나의 어깨를 다독이시며 부모님께서 지켜보는 가운데 “한석이 너는 반드시 훌륭한 인물이 될 것이야, 언제 어디서든 최선을 다하는 마음가짐으로 공부하거라.” 그리고 “집안 어른들이 모두 훌륭하시니 늘 말씀 잘 듣고 따라야 한다”는 격려의 말씀을 주시는 게 아닌가.

아버님과 어머님께서는 선생님께 극진한 예우로 인사하시며 그때만 하더라도 고귀품으로 취급받던 시골에서는 극히 보기 힘든 파카 만년필을 선물하시며 그간의 선생님의 배려와 노고에 감사하며 앞으로도 늘 건강하시라고 인사를 주고받는 것을 보며, 일견 나는 두 주먹을 불끈 쥐며 더욱 큰 꿈으로 부풀어 있었다. 이제 비로소 새로운 세상이 열리는 것 같았고 내가 훌쩍 커버린 느낌이었다.

집으로 돌아오면서 키가 훤칠한 아버님께서는 “이제부터 진짜 학업의 시작이야. 부지런하고 씩씩하고 어른들께 인사 잘하는 모습으로 모든 것에 대해 겸손하게 처신해야 한다”는 말씀을 당부하셨다. 그리고 집에 돌아오자마자 아버님 어머님께서는 큰 방으로 나를 부르시는게 아닌가. 두 분이 나란히 앉아 계셨다. 막 내가 정좌하고 꿇어앉자, “오늘은 국민학교의 졸업식이자 새로운 공부를 시작하는 날”이라며, 천자문 한권을 내게 건네시며 “이제 한달 남짓하면 서당에 입학하니 그 안에 이 천자문을 떼도록 하여라”고 말씀하시는 게 아닌가. 공부라면 어느 정도 자신이 있었지만 생전 보지 못한 한자로 가득한 책을 보니 그것도 한 달 만에 그 내용을 익히라 하시니 정신이 번쩍 들었다.

책 두께가 당시만 하더라도 너무나 크고 한문이 전혀 생소했기 때문에 겁부터 더럭 난 것이었다.

그리고 다음 아버님 말씀에 더욱 온 정신이 땀이 날 지경으로 긴장 되었다. “공부란 모든 면에서 새로운 것을 개척하는 것이야.” “너 같으면 능히 할 수 있을 거야”하시는 게 아닌가. 인정받는다는 것은 말할 수 없는 기쁨이지만 이 또한 얼마나 큰 부담인가. 정신을 빼앗길 만큼의 긴장으로 식은땀이 날 지경이었다.

내 방에서 펼쳐놓고 본 천자문의 무게는 천근만근으로 내 어깨를 사정없이 눌렀다. 옛날 지질이고 더구나 조상님의 손때가 대대로 묻은 천자문이라 내게 그 무게는 커다란 압박감으로 돌아왔다.

서당에 입학할 날이 겨우 한 달 정도 남았는데 어떻게 이 많은 글자를 쓰고 내용을 익힌단 말인가. 정신이 아득하고 겁부터 더럭 났지만, 아버님의 말씀 중에 “너 같으면 할 수 있을 거야”란 말씀이 나에게는 천근만근의 무게로 다가왔다. 아, 여태 나를 아무 말씀 없이 지켜보신 아버님이 나를 이렇게도 인정하고 계셨구나 하는 생각에 이르자 순간 말할 수 없는 용기와 감격이 내 몸을 스쳐갔다.

그리고 어떤 희열로 말할 수 없는 행복감과 자신감으로 가득 찼다. 어떤 결심이 확고히 서자 나는 그로부터 밤낮을 가리지 않고 천자문 쓰기와 암기, 내용을 익히느라 시간가는 줄 몰랐다. 길을 오가며 더러는 심부름을 하면서도, 잠자리에 들 때까지도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국민학교를 졸업하기 전 아버님, 어머님께서는 나의 진로를 놓고 매우 고심하셨다고 한다. 국가주도인 문교부 편제인 중학교에 입학시킬까, 아니면 당시까지만 해도 여러 문물이 앞선 중국의 교육 상징인 한문교육으로 서당으로 입학시킬까 하고. 한동안 나의 진로문제로 어른들은 무척 고심하며 많은 의견과 토론으로 영특하고 온 마을의 기대감으로 가득했던 나의 앞길을 염려하신 게 분명했다. 당시만 하더라도 솔직히 누구나 나이만 되면 입학하고 졸업하는 국민학교는 별 존재감이 없었다.

그나마 6.25동란으로 더욱 낙후된 교육체계와 적당히 수업일수만 채우면 졸업하는 당시의 중학과정보다는, 서당 수업이 인간의 삶과 보편적인 가치관, 그리고 삶의 본질인 인간사상과 인문학과 성리학의 바탕이 된 한문이 진솔한 학문이라고 믿던 시대였다.

부모님의 뜻에 말없이 수긍한 나는 그해 조용하고 아득한 서당에 입교하게 되었다. 아버님 존함과 함자를 익히 듣고 알고 계신 듯 50대 중반의 서당 훈장님께서는 반가이 맞아주셨다. 그리고 20여 명이 조금 넘는 학동들 앞에서 여러 질문 끝에 내가 국민학교를 마치고 한 달도 되지 않은 시점에 천자문을 스스로 뗐다는 것을 아시고는 신기하고 놀라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시며 칭찬과 격려를 아끼지 않으며 신동이라고 감격해 하셨다.

학동들을 둘러보니 이미 장가를 간 나이 스물이 넘은 이들도 있어 쑥스러웠지만 나의 서당 수업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양한석 장로

• 문현중앙교회

•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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