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 바울 선생은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으로 말미암아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지 않았던가. 그 당시 나는 좀더 손쉽게 많은 돈을 벌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사명자의 길에서 돈과 명예를 배설물로 여기지 않고는 헌신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깊이 깨달았다.
무보수로 봉사하면서 깨달은 것
신학생이면 누구나 교회를 선택해 초등부, 중등부, 고등부, 대학부, 청년부를 맡거나 개척 교회를 돕는 일을 해 실천 점수를 받아야 했다.
나는 마침 평소에 가깝게 지내던 선배 목사가 성수동에 있는 모 장로교회로 부임했는데, 그의 요청으로 주일학교와 중고등학생을 지도하기 시작했다. 처음에 주일학교 학생이 40여 명, 중고등부가 20여 명이었는데 한 달이 못 되어서 100명과 60여 명으로 배가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두 달 동안이나 열심히 봉사했지만 사례비나 교통비가 전혀 없었다. 내 호주머니까지 털어가면서 봉사한 대가가 전혀 없다는 데 대한 불평이 아니었다. 선배 목사가 나에게 교통비나 사례비를 주고 싶어해도 교회 재정이 어려웠다. 게다가 당회원들의 무관심이 내 마음을 아프게 했다.
어느 날 토요 학생 예배를 끝내고 신학교로 돌아가야 하는데 나에게는 버스표 한 장도 없었다. 버스를 두 번이나 타야만 하는 길이었다. 하는 수 없이 교회 앞에서 상원 다리까지 가는 버스에 올라서 안내양에게 통사정했더니 내게 인정을 베풀어 주었다.
상원 다리에서 내렸다. 길을 건너 광나루까지 가는 버스를 또 타야 했지만 또다시 안내양에게 사정하기는 나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상원에서 신학교까지 걷기로 했다. 통행 금지 시간에 걸리지 않도록 빠른 걸음으로 신학교에 도착했을 때 기숙사로 가는 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나는 친구들의 취침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망설이다가 마침 야경을 도는 경비 홍 장로님을 만났다. 나는 그 장로님께 예배실을 열어 달라고 부탁드렸다. 예배실에서 밤새 떨면서 기도하다가 새벽에 기숙사 방으로 돌아왔다. 나의 룸 메이트였던 임천규 형제는 혹시 내가 교회에서 오다가 잘못되지 않았을까 걱정하며 기다리다가 밤잠을 설쳤다고 했다. 나는 이러한 어려움을 극복하면서 일년 반 동안 그 교회에서 봉사했다.
일년 반 동안 무보수로 일한 뒤에 오는 어떤 허탈감도 없지는 않았다. 그러나 사람들이 아무리 돈을 사랑하고 돈과 하나님을 동시에 섬기려는 이기적인 삶을 산다고 해도 목회자가 그릇된 직업관이나 돈에 대한 욕심을 넘어서지 않고는 목회란 불가능한 것이다. 나는 어느덧 지친 나머지 또 다른 봉사의 길을 찾으면서 주님의 인도하심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지금은 미국 플로리다 주 잭슨 빌에서 목회를 하고 있는 황태준 형제가 나를 찾아와서 기쁜 소식을 전해 주었다. 미림목재회사에서 장학금을 준다는 것이었다. 남은 2학기 장학금을 책임지겠다는 너무나 반가운 소식이었다. 일년 반 동안이나 무겁게 느껴졌던 피곤이 한순간에 사라지는 듯했다.
무릇 주님의 사역에 동참하는 자들에게 아무런 보상이 없다는 것은 무리한 요구라고 생각했다. 그 일은 그 뒤 내가 목회할 때 두고두고 교훈으로 삼고 있는 귀중한 깨달음이었다.
나는 사랑을 필요로 하는 곳을 찾아 도봉구 수유리에 있는 임마누엘 여시각장애원에서 봉사하게 되었다. 그들은 나를 친형제처럼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내가 갈 곳은 고독하고 쓸쓸해 나를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란 점을 깊이 깨닫게 되었다.
내가 맡아 가꾸어야 할 곳이 비록 길가와 같고 돌밭이나 가시밭과 같다고 하더라도 옥토로 만들어 씨앗을 뿌리는 복음의 농부와 같은 심정으로 가야 할 선교의 장임을 깨닫게 된 것이다.
“주여, 내가 당신을 사모함같이 나를 필요로 하는 많은 사람들을 사랑할 힘을 주소서. 내가 근시안적인 지도자가 되지 않도록 깨우쳐 주심으로 눈이 부자유한 자가 눈이 부자유한 자를 인도하여 구렁텅이에 빠지지 않도록 하소서.“
잊지 못할 신학 시절 친구들
신학생 시절 서로 미래 사역에 대한 꿈을 나누던 친구들을 주님께서 나에게 허락하신 것을 참으로 감사하게 생각한다. 지금은 장신대 교수로 재직 중인 정장복 형제가 어느 날 갑자기 모친상을 당해 우리들은 그곳에 가서 함께 예배를 드리면서 조의금을 전달했다. 그 당시로서는 300원이란 큰돈을 내가 선뜻 그에게 건네주게 된 일화가 있다.
김선태 목사
<실로암안과병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