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매산인들의 신앙과 수난… 한국교회에 남긴 발자취
그는 전교생의 학년반 명단을 책상 위에 적어 놓고 매일같이 그들을 위해서 기도했으며, 아침 조회 시간에 혹시라도 딴전을 부리는 학생이 있으면 즉시 그 학생의 이름을 불러서 주의를 주었다. 그래서 그후로 모든 학생들은 김형모 교장을 존경하게 되었다고 한다.
아무리 공부를 잘해 대학을 진학하는 학생이 있어도 서울이나 광주로 진학하는 일은 철저하게 막았으며, 1차적으로 예수 믿는 학교인 대전대학(현 한남대학교)에 진학하게 했다. 그만큼 대학 교육도 신앙 위에서 실시할 때만이 참된 인간이 될 수 있다는 그의 신념만은 틀림없었다.
순천 지방에서는 물론 호남 지방 교계 인사들이 그의 인격에 감화를 받아 1964년 제49회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총회장으로 선출하기도 했다. 중·고등학교 교장이 대교단의 총수가 된다는 일은 꿈에도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이것 하나를 보아도 그의 인격이 어떠했는가를 잘 알 수 있다.
순천노회 15인 사건과 변요한 선교사
그 외에도 매산인으로 변요한 선교사의 영향을 받아 순천노회 15인 사건에 연루되었던 인물은 안덕윤, 선재련, 김순배, 양용근 목사 등이었으며, 이들은 모두가 순천성경학교 교장이었던 변요한 선교사의 정신을 계승했다.
변요한 선교사는 농한기를 이용해서 순천 지방을 중심으로 여천군, 광양군, 구례군, 보성군, 고흥군, 곡성군 일부 등 산재해 있는 교회 지도자를 불러 달성경학교를 실시했으며, 이 중 장래가 촉망될 만한 사람은 따로 불러 순천성경학교에서 진학하게 했다.
이 성경학교는 3년 과정으로서 엄격하게 성경만 가르쳤으며 전원 기숙사에 입사해야 하기 때문에 훈련은 육군사관학교 못지않게 철저한 경건 훈련을 실시했다. 결국 이 성경학교를 졸업한 목회자들이 훗날 일본 천황제에 도전하면서 불경죄에 해당되는 죄목으로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이 중 15명 가운데 순천성경학교를 졸업한 목회자는 관리중앙교회 오석주 목사, 당오리교회 선춘근 전도사, 조성리교회 박창규 전도사, 광동중앙교회 안덕윤 목사 등이다.
그 외 순천중앙교회 박용희 목사, 광양읍교회 선재련 목사, 벌교읍교회 김형모 목사, 순천 승주교회 나덕환 목사, 고흥읍교회 김정복 목사, 여수읍교회 김순배 목사, 명천교회 임원석 목사, 구례읍교회 양용근 목사, 두고리교회 김형재 목사, 상삼리교회 안덕윤 목사 등이다. 이 중 이미 순천 매산학교 출신들 중에는 변요한 선교사로부터 재림사상을 받은 사람들도 있었다.
일본 경찰이 이들의 사상을 직접 파악한 경로는 각 지서에서 근무한 경찰관들로부터 설교 내용을 입수해 파악하고 그 파악된 내용이 순천경찰서 고등계 형사실로 보고가 되었다. 고등계 형사실에서는 일본 천황제의 사상과 대결된 부분만 발췌하고 1940년 11월 15일 전원을 구속했다.
천황제 사상과 대결되었던 부분은 첫째 재림 천년왕국설, 둘째 그리스도의 재림설, 셋째 천국과 말세, 넷째 그리스도의 지상천국 등으로 분류해 심문했다.
한결같이 재판관 앞에서 대답한 내용은 단 한 가지로 요약되었다.
“예수가 지상 천국을 건설하기 위해서 재림하게 되면 천황은 어떻게 됩니까?”
일본 재판관의 질문은 천황제의 위상 확립이었다.
“예수 그리스도가 재림하면 천황도 심판을 받습니다.”
이 말에 놀란 재판관은 더 이상 재판을 지속하지 못하고 중간에 정지한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이러한 재판이 지루하게 계속되면서 한 사람씩 형량이 내려지기도 했다. 사건에 연루되었던 15명의 목사와 전도사들은 1년 반에서 3년의 형을 받고 모두 광주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그 중 양용근 목사는 1943년 12월 5일 추운 감방에서 순교하고 말았다. 그후 다른 수임자들은 형기가 만료되어 출감은 했지만 여전히 일본 경찰의 감시 대상이었으며, 교인들이 애타게 기다렸지만 그들 중 단 한 사람도 교인들 곁으로 돌아온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해방과 함께 일제의 감시 대상이 되었던 14명의 목회자들은 다시 목회 현장으로 가 굳게 닫혀 있었던 교회의 문을 활짝 열고 하나님께 해방의 감사 예배를 드리면서 찬양하고 영광을 돌렸다.
한편 순천을 떠났던 변요한 선교사는 한국의 독립과 순천 지방 목회자와 교인들을 위해 기도하다가 1946년 해방된 제2의 조국에 돌아오지 못하고 영원한 하늘나라로 떠났다. 그리고 끝내 순천역에 전송나왔던 15명의 목회자들이 형무소에서 고초를 치른 일은 모르고 떠났다. 먼저 하늘나라에 가 있던 양용근 목사를 통해서 순천 지방의 수난 사건을 자세하게 들었으리라 생각한다.
한편 1950년 한국 전쟁으로 김정복 목사는 고흥에서 순교를 했으며 그후 다른 목회자들은 국가로부터 독립유공자로 인정을 받고 모두들 한국 교회 역사에 빛나는 인물들이 되었다.
또한 순천선교부 인원 충원에 공이 컸던 안채륜 선교사는 1918년까지 순천 지방 농어촌 선교 사역에 종사하다가 귀국했으며 순천을 떠난 이후의 생애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다. 다만 한국에 선교사로 오기 이전의 기록을 통해 1902년에 킹칼리지를 졸업했으며, 1905년에는 리치먼드유니온신학교를 졸업한 후 1905년 10월 22일 동 하노바에서 목사안수를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후 평신도선교사운동을 하다가 순천에 오게 된 것이다.
역시 순천선교부 개설에 개척자적인 역할을 했던 고라복 선교사는 1929년 건강상의 이유로 두 자녀만 순천 땅에 묻고 부인과 함께 귀국했으나 1932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고라복 선교사는 한국에 선교사로 오기 전 미국 대비슨대학교, 루이빌신학교, 시카고대학 신학부를 이수하고 1907년 목사안수를 받았다. 그리고 곧장 부인과 함께 광주에 와서 얼마 동안 농어촌 지역을 순회하면서 사역하다가 순천으로 옮겨가 그곳에서 선교활동을 했다.
안영로 목사
· 90회 증경총회장
· 광주서남교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