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이슈] 한국교회 순교자들 (4) 한경희 목사 ②

Google+ LinkedIn Katalk +

신학생 재학 시절, 전도·교회 봉사에 열성적

그리스도 말씀 전파… 대종교와 격렬한 대립

1910년에 평양장로회신학교에 입학해 신학생으로 재학 중에도 전도와 교회 봉사를 열성적으로 했고, 후일 저명한 목사가 되어 한국 교계를 이끌게 되는 동료들을 사귈 수 있었다. 1914년 5월 15일 33세 때 제7회로 졸업했다.

한경희는 평북노회 소속으로 같은 해 8월 7일 철산읍 예배당에서 3·1 독립운동 때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인 양전백 목사에 의해 중국 길림성 중동선 지역의 전도목사로 안수받았다. 평북 지역의 여러 유명교회에서 한경희 목사를 청빙하고자 했으나 그는 헐벗고 가난한 만주에 사는 동포를 위해 헌신하기로 작심했다.

당시 만주에 사는 동포들의 비참한 생활에 대해 미국 장로교 선교사 쿡(Welling T. Cook, 鞠裕致) 목사는 다음과 같이 선교본부에 보고했다.

“만주에 오는 조선 이민자의 고통은 심지어 그들의 불행을 실제로 목격하는 사람조차도 완전하게 묘사할 수 없다. 겨울날 영하 40도의 혹한 중에서 흰옷을 입은 말 없는 군중은 혹 10여 명 혹 20여 명 혹 50여 명이 떼를 지어서 산비탈을 기어서 넘어온다. 그들은 만주의 나무 많고 돌 많은 산비탈의 척박한 토지와 더불어 악전고투하며 한 가지 살길을 찾기 위해 새로운 세계를 찾아서 오는 것이었다.

거기서 그들은 꾸준히 노력해서 중국인의 밭 위에 있는 산비탈의 불모지를 괭이와 호미로 땅을 갈고 손으로 심고 손으로 거두며 흔히 생을 유지하기에는 도저히 불가능한 초근목피를 먹으며 살아가는 것이다. 많은 사람이 식량부족으로 죽어 갔다. 부인과 소아뿐 아니라 청년들도 얼어 죽었다. 그들의 생활에 질병이 엄습했다.

여러 명의 조선인이 강에서 맨발로 바지를 걷어 올리고 얼음 조각이 섞인 강을 건너서 저편 언덕에서 바지를 내리고 신을 신는 것을 나는 본 적이 있다. 엷은 의복을 입은 여자들이 신체 대부분을 노출한 채 유아를 등에 업고 갔다. 그와 같이 업고서 서로 조금이라도 체온을 유지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니 아이의 다리는 엷은 옷 밖으로 나왔기 때문에 점점 얼어붙어 작은 발가락들이 서로 붙어 버린다. 굽은 등과 주름살 많은 얼굴의 남녀 늙은이들은 끝없는 길을 걸어서 기진맥진해 몇 발자국도 걷지 못한다.

젊은이든 늙은이든 다 이러한 모양으로 고향을 떠나왔다. 이같이 과거 일 년간 1920년에 7만5천 명이나 되는 조선인들이 만주로 건너왔다. 현재 동북지방인 만주에 산재한 조선인들은 5십만 명을 헤아린다.”

안수 후 바로 사역지로 떠난 한경희 목사는 마적의 출현이 빈번하고 혹독하게 추운 기후 속에서 무려 3천500리 이상을 다니며 전도했다. 또한 소작인이 대부분이라 수탈당하는 등 온갖 어려움을 겪던 동포 농민들에게 조합을 결성하도록 지도했다. 3곳의 조합을 결성하는 성과도 냈다.

한경희 목사는 1914년 8월 만주 지역 독립운동의 본산지이자 이주 한인들이 거주하던 북만주 중동철도 지역에 전도목사로 파견되어 1916년까지 교세 확장을 위해 활동했다. 

중동철도 주변 지역은 독립운동기지가 있던 곳으로, 그의 전도 활동은 자연스럽게 독립운동과 연계를 맺게 되었다.

한경희 목사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전파하면서 1914년 당시 만주에 30만 명의 신도를 지닌 대종교와 격렬하게 대립했다. 그는 대종교가 신으로 섬기는 단군(檀君)이 민족에게 중요한 인물이지만 결코 창조주가 아님을 강하게 설파했다.

이승하 목사<해방교회 원로>

공유하기

Comments are clos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