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정선교] ‘전근대 한국행형사’ 상고사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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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감옥이 원형이었기 때문에 위지(魏誌)의 저자는 이를 비교 대상으로 선택해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따라서 이로써 직접적으로 부여의 감옥이 원형이었다고 추단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당시 부여의 감옥은 어떠한 모양이었을지에 대해서는 전혀 알 수 없지만 아울러 한반도 내 북부지방과 같이 비교적 중국의 문화가 들어오기 쉬운 곳에서의 감옥은 필시 원형을 채용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먼 후세에 한반도 내 각지에 원형의 감옥을 만들기에 이른 기원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한편 한반도 남부 즉 마한(馬韓), 진한(辰韓), 변한(井韓)의 삼한 감옥은 어떠했을지와 관련해서도 변한에서는 명백히 알 수 없지만 진한과 마한에서는 감옥이 만들어져 있었던 것 같다. 그것은 ‘위지(魏誌)’에 기록된 진한의 풍속 중에 진한은 ‘옥을 만드는 데에 나무를 옆으로 쌓아 이를 만들어 마치 감옥(年獄)과 유사한 것으로’라고 하고, 부여의 성책이 둥글어서 감옥과 유사하다고 하는 것과 같은 필법으로 쓰여 있다. 즉 주택의 비교 대상에 감옥을 가지고 온 점에서 생각하면 당시 그곳에는 이미 감옥이 만들어져 있었다고 추측할 수 있는 이유이다. 

마한에서는 풍속을 기록하고 있는 내용 중에 ‘지방에서 군(郡)에 가까운 여러 국가는 사소한 예의범절에 관한 풍속을 알고 있어도 먼 곳은 단지 죄수와 노비의 모습과 같고’라고 기록해, 국가 가운데 미개지방인 민족집단의 상태를 죄수 집단과 유사하다라고 형용하고 있는 점에서 보면 당시 마한에서도 이미 죄수의 집단, 즉 감옥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을 그 반면에서 이야기하고 있다고 해도 좋은 이유이다. 그리고 양자 모두 그 상태 등에 대해서는 물론 이를 알 수 없다.

삼국정립 시대 이후의 신라, 고구려, 백제의 감옥에 대해서는 삼국 모두 국가 초기부터 역대 왕은 잦은 기회에 빈번하게 사전(故典)을 베풀어 전국적으로 또는 서울 또는 한 지방에 한해 죄수를 해방한 사실이 실로 많이 있었기 때문에 이 점에서 보더라도 삼국 모두 감옥을 가지고 있었으며 더구나 서울과 지방에 걸쳐 분포되어 있었다는 것도 추측할 수 있다. 

김성기 목사 <세계로교회>

 한국교도소선교협의회 대표회장

 법무부 사)새희망교화센터 이사장

 대한민국새희망운동본부 대표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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