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이슈] 한국교회 순교자들 (4) 한경희 목사 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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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도 지역서 전개한 기미 독립운동 앞장

신앙으로 금주령을, 헌신으로 민족 살려

한경희 목사의 생활개선 노력에 감동되어 한족회에서는 1920년 4월 10일 서간도 전 동포사회에 한족회 총장의 이름으로 금주 금연령이 내려졌다. 이 시기 그는 다음과 같은 허사가를 작사, 작곡하기도 했다.

술 마시는 동포들이여 너의 살림 어이하랴/술만 먹고 춤만 추면 너의 희망이 족할까?/(후렴) 어린 처자는 주린 배를 움켜쥐고 앉았으니/네 장차 가련하다 술 마시는 자여/胡米 밥에 된장찌개 하루 두 번 어려운데/술만 먹고 춤만 추면 너희 희망이 족할까?

서간도 지역 전체의 큰 지도자로 인정받게 된 한경희 목사는 독립운동에도 참여했다. 1919년 3월 1일을 기해 서울에서 일어난 기미 독립운동을 간도 지역에서 전개하는 데 앞장섰다. 그의 주도하에 1919년 3월 7일 삼원포의 대화사 예배당에서 2천여 명이 모여 시위를 했다. 또 은양학교 학생 및 기독교인 300명과 은양학교 예배당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하면서 서간도 지역 최초의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그 영향으로 간도와 남만주 전역에 만세운동이 전개되기 시작했다. 그는 이뿐 아니라 간도 지역 독립운동단체의 결성과 활동을 계속 지원했다.

한경희 목사의 지도로 서간도 지역에서 교회는 계속 성장했다. 새로 목회자들이 파송되어 왔다. 또한 한경희 목사의 주도로 서간도 지역에서 다른 지역으로 전도자를 파송하는 일도 점차 늘어나게 되었다. 과거 그에게 전도하다가 핍박받은 일이 있는 이봉태 조사가 평양의 장로회신학교를 마치고 그를 지원하기 위해 오기도 했다.

그러나 1920년 경신참변으로 간도 사회는 큰 피해가 있었다. 이 사건을 보도한 <독립신문>에 따르면 학살당한 동포의 수가 3천469명에 달하고 주택이 불탄 것이 3천200호이며 학교와 교회가 불탄 것이 50여 곳이라 할 정도였다. <남만노회록>에 의하면 경신참변으로 인한 순교자는 삼원포교회의 안동시, 방기전 장로를 포함해 33인에 달한다고 했다. 당시 교회는 집중적인 공격을 받아 불탔으며, 순교한 이들 중 상당수는 일본 군인에게 잔인한 방법으로 살해당했다.

이 시기 한경희 목사는 다행히 신자 아홉 가족과 함께 액목현(額穆縣)으로 이주할 수 있었으며 농민들을 모아 조합을 결성하고 바른 삶의 길을 지도했다. 그러나 그는 1921년 8월 다시 삼원포교회로 와서 교회의 재건에 힘썼다. 성도들과 주민들을 위해 특별 기도회를 했다.

한경희 목사의 사역은 시간이 흐를수록 빛을 발했다. 마침내 1922년 8월 21일 열린 제4회 남만노회에서 노회장으로 선임되었다. 이후 1923년 그는 남만교육회를 설립하여 회장으로 추대되었고, 1924년에는 남만노회장으로 재선되었다. 그때 동포 농민들의 생활 안정을 위해 농민공사(農民公司)를 조직했다.

이어 1925년 다시 남만노회장으로 선출되었으나 이 해에는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시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1926년에는 교회 지도자들과 선교사들의 협조로 흥경삼성중학교(興京三省中學校)를 설립했고, 기독교협진회를 설립했다. 1927년 한경희 목사의 헌신에 감동되어 노회에서는 그를 네 번째로 남만노회장에 추대했다.

한편 많은 중국인이 만주로 들어오고 중국 거주 한인들에 대한 일제의 개입이 노골화되자 동포들의 삶이 더욱 어려워지는 것을 보면서 한경희 목사는 1928년 귀화한족동향회를 주도적으로 조직했고, 간사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를 비롯한 기독교 지도자들이 동포들에게 귀화를 권할 수밖에 없게 된 이유는 동포들이 소작인으로는 도저히 생계를 유지할 수 없는 현실적인 문제 때문이었다. 이것이 문제가 되어 한경희 목사를 감시하던 일제가 그를 구속 수감했다.

이승하 목사<해방교회 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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