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이슈] 한국교회 순교자들 (4) 한경희 목사 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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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와 조국 잇는 복음 길… 순교 정신으로 선교

한경희 목사, 민족과 신앙 위한 헌신의 삶과 죽음

“(중략) 참 신앙의 고난이란 시련을 겪은 다음에 비로소 얻는 것인 고로 우리는 이 고난을 이기고 신앙을 점점 공고히 하지 않으면 아니 된다. 이런 때를 당하여 지금 교회는 사랑과 지혜와 용맹하므로 일하는 목자를 요구한다. 우리 조선 기독교 교역자는 모두 순교자 한경희 목사와 같이 순교 정신으로 선교에 종사해야만 한다.”

한경희 목사의 순교에 대한 기록은 1935년도 제25회 장로교 총회 총회록에 장장 11페이지에 걸쳐 자세하게 일대기 형식으로 게재되어 있다. 이런 일은 실로 예외적인 일이다.

한경희 목사는 남만주 여러 곳을 순회하며 피폐한 삶을 살고 있던 우리 민족 전도에 힘썼으며, 저 먼 북만주 지역도 마다하지 않고 자원해 갔던 전도의 대사도였다.

한국과 남만주는 지리적으로 연결되어서 역사적으로 언제나 교섭이 활발했다. 더구나 일제 치하에서는 일제의 착취와 생활이 곤고하게 되므로 만주나 그 너머 시베리아 땅을 찾아 떠나는 이민의 행렬이 끊이지 않았다. 그곳에서는 독립운동, 특히 무장독립운동이 과격해서 일제의 군사적 대응이 극심했기에 우리 동포들의 환난은 잠잠할 날이 없었다.

우리 교회는 그들의 아픔과 고난을 외면할 수 없어서 그들을 전도하면서 그들의 생활 안전을 위한 노력 또한 쉬지 않았다. 하지만 거기 따른 환난과 핍박도 우리 교회 역사를 피로 물들게 했다.

그래서 만주와 그 너머 시베리아에 관련된 우리 교회의 피눈물 나는 역사와 문학이 줄을 잇고 있었다. 총회록이나 연회록에 그런 사건들이 즐비해 눈물 없이 읽어 내려갈 수가 없었다. 이광수나 박계주, 임옥인, 박종화, 안수길, 그리고 정영택의 문학들이 그 대표적인 것들이었다.

한경희 목사는 남만주 여러 곳을 순회하며 열정적으로 전도했다. 더구나 그는 가는 곳마다 우리 겨레들의 비참한 살림을 목격하고 농민공사, 기독교협진회, 농무조합, 한족동향회 등을 조직해 생활 안전이라든가 우리 겨레들의 단결에 힘을 기울였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민족주의를 고취하게 되었고, 그래서 일경의 요시찰 인물로 항상 미행당하는 처지였다. 실제로 1924년 그는 장로교 총회에 참석하기 위해 압록강을 건너오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얼마 동안 고생했다. 그러다가 1928년에 다시 체포되어 3년간이나 옥고를 치른 것이다.

한경희 목사가 출옥 후에 다시 찾아간 곳은 저 먼 북만주 지역이었다. 길림성 북지방이었는데 그곳은 공산주의자들이 대거 활동하던 험악한 지역이었다. 1935년 1월, 한경희 목사는 비참한 지역에서 눈물짓는 동포들을 위로함이 더욱 기쁘며, 주의 도를 전하다가 악당들에게 죽임을 당하는 것이 더 신성하다는 말을 남기고 지역 교회들을 돌아보러 나섰다가 공산당원에게 총살당한 뒤 얼음 구덩이 속에 버려졌다.

왜 한경희 목사는 총살을 당해서 죽었는데 또 얼음 구덩이 속에 집어넣었을까? 아마도 증거인멸을 위함이었을 것이다. 이 사실은 그의 아들 순옥이 삼촌에게 쓴 편지에서 드러났다. 모든 비밀은 드러난다는 것이 성경 말씀이었다.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마 10:26).

그래서 총회에서 이 사건이 보고되었다. 이 순교의 사실이 알려지게 된 것은 두 주일이 지난 2월 25일의 일이었다. 한경희 목사의 아들 순옥이 그의 삼촌에게 쓴 글에서 처음 그 사실이 드러났다. 그 글이 당시 총회장이던 이인식 목사에 의해서 <기독신보>에 전재되었다. <기독신보>는 한경희 목사의 순교에 대해 사설을 두 번씩이나 실었다.

이승하 목사<해방교회 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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